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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평생의 다이어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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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과체중으로 살았다. 어른들은 날씬한 체구의 언니와 나를 비교하며 “네 언니 먹을 것까지 다 빼앗아 먹었지?”라며 농담했다. 웃자고 한 소리지만 같은 말을 295837948번쯤 듣는 어린아이는 상처받는다. 내 부모는 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욕하고, 상처 주었다. 어머니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 간식을 챙겨주며 “맛있게들 먹고 예희는 못 먹게 해라”라고 항상 말했다. 친구들은 간식을 먹으며 나에게 미안해했고, 나는 울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도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나를 싫어하게 되었고, 음식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먹지 않았느냐고? 숨어서 먹었다. 동네 빵집에서 맛있는 빵을 사 들고 와 화장실 문을 잠그고 급히 먹은 다음, 포장지는 가방에 숨겼다가 집 밖 쓰레기통에 버렸다. 밖에선 아이스크림도 캔 음료도, 먹고 마시지 않았다.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것 같았다. 저거 봐, 저러니 살이 찌지.

 

과체중 아동이 자라 과체중 청소년이, 과체중 성인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든 ‘그 뚱뚱한 애’로 통하고 싶지 않았다. 단체복이라는 ‘프리사이즈’ 티셔츠가 내 몸에도 맞길 바랐다. 조심스레 손을 들고, 더 큰 사이즈 없는지 물을 일이 없길 바랐다. 그럼 다들 쳐다볼 거고, 나는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질 테니까.

 

그런데 사실 나는 나서는 걸 좋아한다. 지금도 강연이나 방송 출연 기회가 생기면 저요! 하고 냅다 일어나 덥석 잡는다. 하지만 그런 나를 주저앉히는 데는 긴말이 필요 없었다. “뚱뚱한 년이 나댄다”는 한마디면 충분했다. 사회가 나를 주저앉히고 주눅 들게 했다.

 

이 사회는 과체중인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을 택하든,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라며 등 떠민다. 온갖 이름이 붙은 다양한 다이어트를 경험했는데, 시대별로 유행하는 건 한 번씩은 다 해본 것 같다. 90년대 중반, 단식원 붐이 불었을 땐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보름간 입소했다. 3일쯤 지났을 때 엉엉 울며 집에 가고 싶다고 전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보름 내내 맹물과 이온 음료만 허락되는 곳인데, 냅다 굶으니 체중이 줄기는 한다. 하지만 출소, 아니 퇴소 후엔 금방 회복된다. 풀무원 다이어트와 덴마크 다이어트도 여러 차례 반복했다(덴마크엔 가본 적도 없지만). 90년대 말, 자몽을 구하기 쉽지 않을 때라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귤이나 낑깡은 안되는 걸까 고민했다(안된다고 합니다). 한의원에선 침을 맞고 한약을 먹었고, 양의원에선 주사를 맞고 양약을 먹었다. 성분이 뭐였을까?

 

식사량을 줄이면 배가 고프고, 힘들고, 짜증이 난다. 누가 뭘 먹는 걸 보기만 해도 화가 바짝바짝 날 정도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그런 줄 몰랐다. 한참 나중에 친구들이 슬쩍 말해줘서 알았다. 너 그때 성질 대단했다고. 그랬구나. 나는 그저, 나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날씬해지고 예뻐지면 분명히 아주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몸무게 숫자에 집착하는 건 나를 괴롭히는 행위일 뿐이다. 날씬해지기 전까지는 미완성 상태의 인간이라며, 저기에 고지가 있으니 도착할 때까진 눈 딱 감고 참으라며 나를 채찍질하는 행위. 고지는 66사이즈였다. 55면 더 좋고.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여성 의류회사 디자인 팀에 입사 지원을 했고, 면접에서 탈락했다. 신입사원은 피팅모델 일도 겸해야 하니, 55사이즈의 ‘표준’ 몸매가 아니면 애초에 안 되는 자리라고 했다. 그렇구나, 나는 표준이 아니구나. 옷을 사러 가도 다르지 않다. 고객님, 55세요 66이세요? 77 이상이시면 저희 매장엔 옷이 없어요.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쭉 켜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건강한 몸. 나에게 적절한 몸무게와 근육량, 관절 상태를 알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이 사회는 55, 66이란 숫자와 S, M, L 같은 기호만을 이야기하며 거기에 나를 끼워 맞추라고 한다. 그게 수치스러워 옷을 사자마자 사이즈가 적힌 라벨부터 떼어낸다는 사람도 많다.

 

빼고 찌고를 반복하다 서른이 되었을 때, 어느 때보다 독하게 식사량을 줄여 30킬로그램을 감량했다. 저녁 6시 이후엔 물도 마시지 않다가, 익숙해지자 5시로 앞당겼다. 다시 4시, 3시, 2시가 되었다. 잘하고 있는 거라 굳게 믿었다. 주변에선 난리가 났다. 대단해, 많이 빠졌네! 턱이 뾰족해졌어! 그래서 더 나를 몰아세웠다. 급기야 낮 12시에 그날의 마지막 식사를 하고 물을 마셨다. 내가 잘못하는 거라 믿고 싶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당장 몸무게 숫자가 줄어드는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나.

 

어느 날은 먹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심하게 체했고, 억지로 힘주어 토했다. 거울을 보니,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눈 주위 실핏줄이 톡톡 터져 작은 빨간색 점이 잔뜩 돋았다. 그래도 기뻤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생각했다. ‘야, 이건 살로 안 가겠구나!’ 그리고 그 일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후 밥을 먹고 나서 포만감이 들자 문득 또 토하고 싶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쉽고 간편한, 바로 눈앞에 있는 다이어트 방법. 얼굴에 가득하던 빨간 점과 핏발 선 눈이 떠올라 고개를 흔들었다. 1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나는 이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두 번 하지 않아 정말로 다행이야.

 

어쨌든 30킬로그램이라니, 이 정도까지 살을 뺀 건 처음이라 신이 났다. 몸에 딱 맞는 원피스를 잔뜩 사들여 입었다. 원피스도 하이힐도, 모두 서른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입고 신어보았다. 다양한 사이즈, 다양한 디자인의 여성 의류가 있었다면 그걸 입었겠지만, 당시엔 힙합풍 티셔츠와 청바지가 최선이었다.

그 무렵 동생이 결혼했고, 나는 비장의 원피스를 차려입고 예식장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네 언니 먹을 것까지 다 빼앗아 먹었지?”라는 말로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들 앞에서 ‘어때, 이제 언니보다 내가 낫지?’라고 생각하며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실제로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어른도 있었다. 당황했다. 언니와 함께 손님을 맞이하던 중이니 분명히 언니가 상처받을 텐데. 그 순간, 이게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언니와 나를 비교하며 뿌듯해한 거지? 그리고 나와 내 언니가 왜 이런 사람들 앞에서 정육점 고기마냥 대놓고 평가받아야 하지? 왜 경쟁해야 하지? 자매간만 그런가, 또래 사촌 간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부모님 지인의 자녀와도 마찬가지다. 누구네 집 애는 이번에 몇 등 했다더라, 그렇게 예쁘고 늘씬하다더라, 키가 몇이라더라, 신랑이 그렇게 괜찮다더라. 서로 경쟁하고, 미워하게 만든다. 이 사회는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나저나 이상하다. 살을 그만큼이나 뺐으니 당연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자신감이 넘쳐 홀딱 벗고 다니고 싶고(범죄입니다), 뭐 그럴 거 아닙니까? 하지만 나는 그 시기를 완전히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여전히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난 아직 뚱뚱해, 표준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정체불명의 ‘표준’이라는 게 있다고 믿은 것이다. 매일같이 근사하게 차려입었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쭈구리. 어쩌면 그래서 더 신경 써서 꾸몄는지도 모른다. 사진 찍힐 일이 생기면 가방으로 배와 옆구리를 어떻게든 가리고, 팔뚝과 볼살이 덜 나오는 자세를 찾아 몸을 뒤틀었다. 찍힌 사진은 물론 사전 검열. 이건 뚱뚱하게 나왔으니 지워줘. 요건 턱이 뾰족하게 나왔으니 합격.

 

그리고 시간이 흘러 흘러, 그 어렵게 뺀 살들은 다시 살금살금 집으로 돌아왔다. 이거 봐,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렇지 뭐, 라며 꽤나 울적해졌는데…

 

얼마 전 페이스북에 접속했다가 깜짝 놀랐다. 이 SNS에는 독특한 기능이 있는데, 몇 년 전에 업로드한 사진을 뜬금없이 다시 보여주며 과거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날 나에게 날아온 추억의 사진엔 30대 중반, 그때 그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정장 원피스와 하이힐, 클러치백 차림. 나도 모르게 소리 내 말했다.

 

“세상에, 나 너무 날씬했는데?”

 

하지만 분명히 이 사진을 찍던 날, 나는 내가 뚱뚱하다고 생각했고 사진에 찍히지 않으려 도망 다녔고 1킬로그램이라도 더 빼야 한다며 전전긍긍 안달복달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그랬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그때 그 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는 것. 오늘의 내가 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시간이 지난 후엔 나는 분명히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 거란 걸 알았다.

 

다시 한번 그때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음식 섭취량을 줄여 변비에 시달리던 때, 도움이 될까 해서 아침 공복에 소금물을 한 컵씩 억지로 먹던 때였다. 다행히 진한 화장 덕에 배고픈 티가 가려졌다. 지금도 부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때 딱 좋았다며, 다시 다이어트를 하라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겪은 혼란과 고통을 모른다. 당연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남의 겉모습만 본다.

 

날씬해지기 전에는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눈높이와 요구를 내가 충족시켜줄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내가 정한 눈높이도 아니며, 애써 채워줘도 곧 다시 높은 곳으로 이동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독립한 후 서서히 마음도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부모는 나에게 상처를 준다. 반가워하실 거라 기대하며 카카오톡으로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니 대뜸 살이 더 쪘네, 빠졌네 같은 외모 품평을 한다. 과거엔 속수무책으로 상처받았지만, 지금은 거절하고 거부한다. 그런 대화라면 하지 않겠다고 딱 자른다.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한다.

 

살이 찌면 쪘다고, 마르면 말랐다고 잔소리하는 사람들은 잊자. 지금의 나,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아주기 위해선 내 눈에 내 몸이 익숙해지는 게 먼저다. 내가 나를 자꾸 봐야 정이 들고, 자신을 인정하게 된다. 비주얼 롤모델을 정하는 것도 좋다. 나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의 SNS를 팔로우하며 도움을 많이 받는다. 다양한 의상을 입고 여러 포즈를 취한 사진과 영상에 감탄한다. 이 모델은 그래도 나보단 허리가 가늘어서 좋겠네, 이 사람은 비율이 좋으니까 부럽네, 하며 처음엔 그들의 우월함을 기어이 찾으며 기죽었지만, 계속 보면 서서히 달라진다. 시각적 자극의 효과다. 내 눈에 익숙해지면 내 마음에도 친숙해진다. 그리고 내 몸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한 번에 바뀌진 않지만, 천천히 천천히.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아이들의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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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우리 인간의 뇌가 가장 많이 변하는 시기는 생후 2년간입니다. 갓난아기를 보면 매달 새로운 행동을 하지요. 태어났을 때는 무기력하게 잠만 자던 녀석이 3개월이 되면 목을 가누고, 6개월이 되면 몸을 뒤집고, 9개월이 되면 기어 다니고, 12개월이 지나면 짠!하고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행동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지만 사실은 뇌에서 명령을 내려야만 가능합니다. 어떤 행동이든 뇌가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뒷받침이란 필요한 뉴런끼리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속에는 세포가 대략 몇 개나 있을까요? 놀랍게도 아직 정확히 모릅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30-40조 개라고도 하고, 100조 개가 넘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세포 하나하나가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해줘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5천만이 살아도 별 일이 다 생기는데, 수십 조의 세포가 원활하게 일을 하려면 의사소통이 중요하겠지요. 멀리 떨어진 사람끼리 유선전화와 무선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듯, 세포들도 유선과 무선으로 신호를 주고받습니다. 유선통신을 신경, 무선통신을 호르몬이라고 합니다. 신경은 연결된 곳에만 신호를 전달하는 반면, 호르몬은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신호를 전달합니다. 신경을 이루는 세포를 신경세포, 또는 뉴런이라고 합니다.

 

친구 집과 우리 집이 단 한 개의 전선으로만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몸속의 유선신호 또한 수십, 수백 개의 신경세포, 즉 뉴런이 이어져 전달됩니다. 그런데 뉴런은 전화선과 다른 점이 있어요. 전화선은 한 번 설치하면 몇 년, 몇 십 년을 쓰지만 뉴런 사이의 연결은 항상 변한다는 겁니다. 이걸 신경가소성이라고 합니다. 기타를 연습한다면 처음에는 줄을 정확히 짚는 데도 애를 먹지만, 매일 연습을 거듭하면 아주 빠른 곡도 어렵지 않게 연주할 수 있습니다. 코드를 짚고 줄을 뜯는 동작을 그렇게 빨리 할 수 있는 것은 그 동작에 필요한 뉴런끼리 연결되어 하나의 신경회로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신경회로는 연습을 거듭할수록 점점 강력해지고, 신호가 전달되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포장도로가 되고, 4차선, 8차선에 인터체인지까지 놓인 고속도로가 됩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든 빙판에서 하늘 높이 뛰어올라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고 안정된 자세로 착지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연습에 의해 그 동작에 필요한 신경회로가 만들어진 후 계속 발전해왔기 때문입니다.

 

걷는 동작에 100개의 뉴런이 필요하다고 칩시다. 아기가 돌이 되어 걷는다는 건 그간 뇌에서 100개의 뉴런이 연결되어 신경회로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번 걷고 다시는 걷지 않는다면 회로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매일 걷는다면 뇌는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해서 신호가 더욱 잘 전달되도록 합니다. 우리처럼 아스팔트를 까는 게 아니라 긴 뉴런을 지방 성분의 특수한 절연체로 감싸는 방식을 쓰지요. 이 절연체를 수초, 수초가 뉴런을 감싸는 현상을 수초화라고 합니다. 수초화가 일어나면 신경전달속도가 약 3천배 빨라집니다. 뉴런을 따라 천천히 전달되던 신호가 수초 사이를 점프하기 때문이죠. 한두 발짝도 위태롭게 떼어 놓던 녀석이 점점 잘 걷게 되고 나중에는 천지사방을 뛰어다니고, 엉덩이를 씰룩씰룩 춤까지 추는 건 다 수초화 덕분입니다.

 

두 돌이 지나면 뉴런의 연결과 수초화 과정은 느려집니다. 하지만 이때도 피아노나 수영을 가르치면 그 동작을 하는 데 필요한 경로가 형성되고 수초화가 일어납니다. 뇌는 8세가 되면 대략 성인의 크기에 도달합니다. 크기가 커지면서 운동능력이 함께 발달하므로 8세 정도 되면 성인이 하는 모든 동작을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세계적인 운동선수나 연주자가 되려면 어린 나이에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근력이나 지구력 등이 받쳐줘야 하기 때문에 최대 운동능력에 도달하는 건 한참 뒤지만요.

 

그럼 8세가 되면 뇌 발달이 끝날까요? 그렇지 않죠. 크기가 다는 아니잖아요? 뇌는 발달을 계속합니다. 그러다 12세 전후로 사춘기가 시작되면 다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단 뉴런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면서 연결이 크게 늘어납니다. 동시에 ‘가지치기’가 진행됩니다. 불필요한 뉴런들이 죽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해주면 더 크고 맛있는 열매가 열리듯, 뉴런도 이 과정을 통해 이미 익힌 기능을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능을 익히기는 그만큼 힘이 듭니다. 가지치기를 통해 어떤 기능이 보존될지 정해지면 뇌는 수초화를 통해 그 기능을 강화시킵니다. 운동선수나 음악가가 사춘기를 겪으며 기량이 일취월장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가지치기와 마찬가지로 수초화도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수초화가 일어난 뉴런은 새로운 뉴런과 연결되거나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수초화는 뇌의 모든 부분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진화적으로 오래 전에 생긴 부분부터 최근에 생긴 부분으로, 즉 뇌간 -> 변연계 -> 대뇌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대략 15-16세 경에 운동신경이, 17-19세 경에 변연계가 수초화됩니다. 전전두엽 피질의 수초화는 아주 늦어 24-25세가 되어야 비로소 끝납니다. 그래서 적어도 뇌의 차원에서는 25세까지 청소년으로 봐야 한다는 거지요. 10대 청소년은 변연계는 성숙하고, 전전두엽은 미숙한 상태입니다. 변연계는 감정의 뇌라고 했지요? 또한 보상을 추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은 같은 일에도 감정을 강하게 느낍니다. 동시에 뇌 속의 도파민이 높은 농도를 유지합니다. 어지간한 자극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인보다 훨씬 짜릿한 쾌감, 즉 보상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상황을 종합하여 위험을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감정을 조절해야 할 전전두엽 피질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청소년기 뇌의 가장 큰 특징은 충동은 늘어나는데 충동 조절은 잘 안 되는 겁니다. 정서는 급변하는데 통제가 안 됩니다. 길을 가다 누구와 부딪쳤는데 상대방이 욕을 해요. 수초화가 끝난 변연계는 삽시간에 반응하여 분노가 활활 타오릅니다. 이럴 때 전전두엽 피질에서 ‘상대방이 험악해 보이고, 싸우면 다칠 수 있고, 내일 시험이라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하니 꾹 참고 그냥 가자’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 겁니다. 그대로 주먹이 나가고 싸움이 벌어집니다. 성인은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만 내려다봐도 발바닥이 간질간질한데, 청소년은 꼭 거기서 번지점프를 해야 직성이 풀리죠. 청소년기에 교통사고, 추락이나 익사, 음주운전, 무방비 상태의 즉흥적 섹스, 폭력, 자해, 심지어 자살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가 계속될까요? 정서조절 능력은 20대 중반이 되어야 완전히 성숙합니다. 그래서 10대는 물론 20대 초반까지도 왠지 불안하고, 짜증이 나고, 말이나 행동을 성급하게 하다 실수를 하고, 괜스레 부모님 말이 듣기 싫어 대들기도 하는 겁니다.

 

왜 전전두엽 피질보다 변연계가 먼저 수초화되어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만드는 걸까요? 그 대답 역시 진화에서 찾습니다. 청소년은 일생 중 가장 빠르고, 힘이 세고, 다치더라도 회복이 빠릅니다.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서거나, 사냥감을 향해 돌진해야 했을 때 나이 든 사람이나 어린이보다는 청소년이 앞장서는 것이 집단의 생존에 유리했을 겁니다. 사실 청소년기에는 충동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인지, 사회, 정서능력이 발달하여 성인 수준에 도달합니다. 이런 능력들은 주로 같은 집단에 속한 동료들과 신호를 주고 받는 데 관여합니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청소년기가 되면 무리를 지어 큰 짐승을 사냥하러 나섰습니다.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동료들의 신호를 예민하게 읽어내면서 기회가 오면 몸을 사리지 않고 돌진하는 능력을 갖도록 진화했다는 거지요. 추측이지만 그럴듯하지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독립생활자, 새롭게 시도하는 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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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란 단어는 굉장히 거창하게 들린다. 아휴 저는 그런 거 못해요, 라고 손사래 치며 수줍게 호호 웃어야 할 것만 같다. 대단한 발견, 대단한 예술, 뭐 그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표현 같다. 그러니 자신에게 ‘창작자’라는 말을 허락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창작이란 존재하지 않던 걸 뿅 하고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비틀고 바꾸는 것에 더 가깝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새로운 재료 조합을 고안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나는 음식에 기름을 넣어야 할 땐 카놀라유와 올리브유, 버터를 내키는 대로 번갈아 넣는다. 때론 에라 모르겠다며 마요네즈나 땅콩버터를 한술 푹 떠서 집어넣기도 하는데, 이게 의외로 꽤 맛있을 때가 있다(물론 아닐 때도 있습니다). 설탕 대신 딸기잼이나 사과잼을 넣어보기도 한다. 재미있다. 비빔면에 오이 채 썬 것 대신 샐러리를 올려보기도 하고, 멸치볶음이 어정쩡하게 남았길래 그걸 넣고 파스타를 후다닥 볶기도 한다. 낙지젓과 사과를 넣고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한다. 의외로 괜찮을 때도 있고, 헛웃음 나게 꽝일 때도 있다. 최초의 치즈 라면을 시도한 사람, 참치김밥에 깻잎을 넣은 사람은 모두 위대한 창작자이며 위인이시다. 존경합니다.

 

하지만 누가 억지로 등을 떠밀며 새로운 시도를 하라면 갑자기 하기 싫어진다. 나오려던 괴이한 아이디어가 다시 쑥 들어간다. 요런 즐거움은, 의무로 가득한 빡빡한 일상에서 나오기보단 딱히 할 일 없이 뒹굴거리던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도 놀다 보니 지루해서, 자다 자다 지쳐서 뭐라도 해볼 때 튀어나온다. 휴식과 여유, 여백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는 모두 가능성을 품고 있는 창작자들이다.

 

외출을 앞두고 진지하게 뭘 입을지 고민한다. 이 티셔츠와 저 바지, 사 놓고 쳐다만 보던 화려한 무늬의 양말을 드디어 개시한다. 과한가 싶은데 신어보니 또 괜찮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스티커를 붙인다. 한때는 열 손가락에 당연히 한 가지 색을 칠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런 규칙 따위 잊은 지 오래다. 하긴, 그 시절엔 위아래 세트로 된 투피스 정장만 제대로 된 옷이라고 생각했지. 원피스에 운동화를 신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고.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한다. 모든 것이 창작이며 재창조다. 요렇게 나 즐거우려고, 내 기분 좋아지려고, 내 입에 맛있는 것 넣어주려고 시도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재미있다. 생계를 위해 의무적으로 하는 일보다 몇 만 배 재미있다. 쇼핑만 해도 그렇다. 생리대 일 년 치, 쌀 한 가마니 살 때는 무표정이지만 로드샵 화장품 매장에서 천 원짜리 매니큐어를 살 땐 세상 진지해진다.

 

때론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날도 있다. 뭐, 그럴 때도 있죠. 고르고 고른 매니큐어를 막상 발라보니 영 아닐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엉엉 울며 손톱을 뽑을 생각은 없다. 그게 뭐 대수라고. 새롭게 시도한 요리가 완전히 꽝일 수도 있지만, 식칼을 두 동강 내고 앞치마를 활활 불태울 생각도 없다. 그게 뭐 대수라고. 우리는 그 정도로 기죽지 않는다. 다른 분야의 창작도 다르지 않다. 그냥 하는 것이다. 그거 별로야라는 태클이 들어올 때도 있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재밌자고 하는 건데 어때.

 

때론 요 즐거움을 잊는다. 뭔가를 요리조리 궁리해서 곰질곰질 만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잊는다. 사는 게 바빠서 그렇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체력도 집중력도 대단치 않으니 당장 돈 되는 것, 스펙 되는 것, 티 나는 것 위주로 해야 해서 그렇다. 진심으로 재미있어서, 끓어올라서 하던 것을 그사이 하나둘 잊고 잃는다.

 

나는 핸드폰 카메라에 감사한다. 사진을 좋아하고, 더 잘 찍고 싶어 욕심내면서 장비가 다양해지고 커지고 무거워졌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크고 무거운 카메라가 나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 같아 사진 한번 찍으러 나가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아예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가진 걸 대부분 처분하고, 핸드폰 카메라만 사용한다. 덕분에 한없이 홀가분해졌다. 완벽한 카메라는 아니지만 뭐, 어떤 카메라는 완벽한가. 나는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난생처음 동영상을 찍기 시작해 아예 유튜브 채널까지 개설했다. 쩔쩔매던 영상 편집 프로그램도 이젠 꽤 능숙하게 다룬다(으쓱).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은 지도 어느새 25년이 넘었다. 사진을 잘 찍어서, 혹은 이 일이 돈이 되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 없이 내 재미를 위해 사진을 찍어서다. 경쟁했다면 아마 오래전에 지쳤을 것이다. 돈과도 상관없다. 물론 프리랜서로 다양한 분야의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찍은 사진으로 소득을 얻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은 우연한 기쁨, 부수적 수입이다. 보통은, 다른 일로 열심히 돈을 벌어 사진 찍으면서 놀겠다는 자세다. 스트레스나 부담 같은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느슨하고 헐렁하게 사진과 영상을 찍고 싶다.

 

우리는 너무 심하게 경쟁하고, 그게 몸에 배어버려 아예 인식조차 못 한다. 취미로 즐기는 것마저 악착같이, 참으로 열심히 한다. 사진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끼리 사진 장비로 경쟁하고, 음악이 좋아서 모였는데 스피커와 앰프를 뽐낸다. 내 등산복만 유행에 뒤떨어진 것 같아 신상품을 사기 전엔 등산 모임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최고가 되지 않으면, 최소한 상위권 무리에 속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된 것 같다.

 

나는 취미로 하던 땅고를 몇 년 전에 그만두었는데, 셀프 안식년을 선언하고 해외 여러 나라에서 체류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오랜만에 땅고 슈즈를 꺼내어 가방에 챙겼다. 무척 설렜지만, 한편으론 좀 망설여졌다. 그만둔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자세도 스텝도 모두 잊어버렸는데 괜찮을까? 괜히 춤추러 갔다가 쪽팔리기만 한 거 아닐까? 땅고 동호회에서 알게 된 친구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니 푸하하, 하고 웃는다.

 

“걱정 마. 한국 사람은 세상 어디 가도 제일 춤 잘 춰. 일단 하면 다 생각날 거야. 알잖아. 한국 사람, 뭐 하나 배워도 목숨 걸고 악착같이 배우는 거.”

 

아이고, 맞다 맞아. 나도 그랬다. 즐거워지자고 행복해지자고 시작한 땅고인데도 무슨 성적표라도 받는 기분으로 이를 악물고 배웠다. 그래서 어느새 진이 빠져 그만둔 거였지. 우리는 뭘 하든 공부처럼 일처럼 한다. 너무 바쁘다. 빈틈이 없다. 취미에서도 가성비를 찾고, 여행에서도 가성비를 찾는다. 잘하지 못할 거면 아예 그만둬버린다. 이미 검증된 코스, 맛집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수년 만에 땅고 슈즈를 챙기며 생각한다. 나는 최고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즐겁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게서 다시 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잘 풀리는 날이나 그렇지 않은 날에도 지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계절의 변화를 즐기는 대표적인 환절기 아이템, 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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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국민 학교에서(초등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해 자신이 없다) 배우길, 우리는 사계절을 가진 축복받은 땅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사시사철 변하는 계절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받아들였다. 환절기에 미묘하게 달라진 바람의 온도와 냄새는 늘 그맘때 즈음의 추억을 소환하는 반가운 정령이었고, 날씨 덕분에 우린 굶주리지 않고 식량 주권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가끔 돌고 또 도는 계절에 무상함을 느끼기는 했었지만 서른이 넘기 전까지 한 번도 계절 변화를 불편이라 여겨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세계적인 고급 호텔 체인 이름이 ‘Four Season’이겠는가.

 

때로는 연중 기온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아열대 동네나 지중해성 기후를 안타깝게 여긴 적도 있었다. 물론 그땐 어리기도 했고, 저가 항공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이라서 발리, 괌, 하와이, 푸켓, 팔라우 등의 관광지를 다녀보기 전이었다. 태평양 환초 섬의 사실상 무한한 식량자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고, 온화한 캘리포니아에서 우리와 같은 벼농사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유승준으로 인해 눈을 뜬 웨스트사이드와 이스트사이드의 양단에서도 나는 랩퍼 이센스처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뉴욕 이야기에 뻑이 갔는데, 여기에는 사계절이 뚜렷한 뉴욕 퀸스나 브롱크스의 음습한 골목길 힙합퍼들의 패션이 크게 한몫했다.

 

그러나 아웃도어 문화가 일상화되고 서핑이 패션의 코드가 되고, 바다 휴양지를 맛보기 시작하면서 사계절에 대한 신념은 바뀌었다. 이런 직간접적인 문화 체험을 떠나 날씨에 지치는 일상이 해를 거듭할수록 거칠어지자 사계절에 대한 찬미는 불신과 불편으로 뒤바뀌었다. 싱그럽다는 봄에는 옥상에다 빨래 한번 널기 힘들 정도로 미세먼지가 그득하고, 이상기온의 영향으로 연간 최대최저 기온이 50도 이상 차이가 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계절을 가진 날씨 덕분에 냉방을 하는 만큼 보일러를 떼야 하고, 안 그래도 좁은 집 장롱에 거위털 이불과 패딩 점퍼와 홑겹 린넨 침구와 민소매 탱크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공기청정기가 필수 살림이 됐다. 경제적으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고 심리적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래서 한겨울은 물론, 한여름에도 파랑, 노랑 초록으로 가득한 트로피컬 바이브를 꿈꾸며 여행 예약 사이트를 출근하듯 드나든다.

 

그런데, 이렇게 투덜거리다가도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설렘은 어김없이 시작된다. 특히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디딘 첫발에서 서늘하고 건조한 상쾌한 기운이 느껴질 때, 한여름에 찬물 샤워를 하다 다급히 온수를 트는 것처럼 직전의 불편했던 감정은 금세 잊고 다음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참으로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

 

가을맞이의 핵심은 패브릭이다. 고이 말아두었던 러그를 바꿔 깔고, 따뜻한 색상과 소재의 침구로 바꾼 다음 스프레드를 더 한다. 의자에 담요를 얹고, 벽에는 패브릭 장식을 설치한다. 질풍노도의 10대를 벗어났다면 방 벽에 영화 포스터나 연예인 사진을 붙이는 대신 액자를 걸거나 패브릭으로 벽장식을 하는 성장이 뒤따라야 한다. 나의 경우 블랙&실버로 이뤄진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우승기를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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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러그는 물리적인 인테리어 공사 없이도 공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아이템이다. 기능적으로도 필요하다. 현관 매트와 싱크대 앞, 침대 옆에는 당연히 깔려 있어야 하고, 화장실 세면대 앞에도 깔아놓으면 한결 보드라운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 다만, 가격과 보관상의 문제로 매년 새롭게 마련할 수는 없으니 집에 들이기까지 꽤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아이템이다. 가격과 재질과 디자인이 워낙에 천차만별이고, 물성 상 다양한 제품을 직접 경험하지 못해서 조심스럽지만, 그 어떤 스타일의 제품을 선택하든 돈은 조금 들이는 편이 낫다.

 

러그를 놓는 이유는 맨 바닥의 무심함을 잠시나마 탈피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첫발을 밟았을 때 안온함이 발바닥 감촉으로부터 전달되어야 한다. 화장실이나 베란다가 아니라면 아무래도 천연 염료와 오가닉 면이나 울로 만든 제품이 훌륭하다. 요즘은 스웨덴 브랜드 파펠리나와 같이 친환경 소재로 먼지날림과 진드기 걱정 없는 제품들도 많이 나와 있어서 직접 접촉해보는 편을 권한다. 즐겨 쓰는 브랜드는 에스닉한 로레나카날, 보다 깔끔한 펌리빙과 같은 북유럽 제품들이고 ‘루밍’ ‘짐블랑’ 등의 디자인 편집숍에서 구할 수 있다. 이외에도 ‘챕터원’, ‘구다모’와 같은 편집숍 사이트에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 요즘은 모로코, 페르시안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꼭 따를 필요는 없겠다.

 

물론, 이보다 최대 10배 정도는 저렴한 이케아도 즐겨 찾는다. 시즌별로 가볍게 바꿀 수 있고, 싱크대 앞이나 세면대 앞에 놓을 작은 러그를 찾을 땐 이보다 훌륭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곳도 없다. 다만 얇은 러그일수록 밀릴 수 있으니 미끄럼방지 시트를 함께 사서 깔길 추천한다.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는 팬들턴이다. 가을과 겨울 침대에는 언제나 팬들턴의 ‘국립공원’ 라인 담요를 침대 스프레드로 쓰고, 러그로도 활용한다. 팬들턴은 미국 포틀랜드를 기반으로 하는 나름 유서 깊은 로컬 패브릭 회사로, 인디안 문양을 활용한 패브릭과 굿즈 등을 주로 만들어왔다. 그러다 2010년대 초반 미국발 맨즈웨어 열풍을 타고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다음 중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대중화를 하다보니 한창 매니아들이 열광할 때에 비해 한물갔다고 할 수 있지만, 집 안 분위기를 따뜻하게 만드는데 아직 팬들턴 만한 제품은 만나지 못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주요 담요 라인은 여전히 미국 내 제조를 고수하고 있다.

 

참고로, 패브릭은 마냥 지켜보는 물건이 아니다. 인테리어 사진으로만 만날 땐 근사하고 따뜻한 아이템이지만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 먼지의 온상이 된다. 따라서 패브릭으로 집을 꾸몄을 경우 부지런한 청소가 요구된다. 장모로 만들어진 러그를 선호하지 않는 까닭이다. 우선 바닥 청소를 할 때 침구 청소도 함께하는 습관을 들이도록하자. 다양한 침구 청소기가 시중에 있다만, 나의 경우 밀레 청소기에 미니 터보 브러쉬 헤드를 물려 먼지를 박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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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그놈의 가성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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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도 꽤 찍으니까 혼자서 3인분어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가성비 괜찮은 외주 작가예요”라고 자기소개를 하곤 했다. 3인분의 일을 한다면 3인분의 고료를 받아야 하는데, 1인분 고료를 받으면서 일을 세 배로 하겠다는 걸 마치 자랑인 듯 홍보했단 얘기다. ‘가성비 좋은 작가’, 이게 내 강점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더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생각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이고, ‘가성비’라는 표현이 싫어져서다.

 

다들 알겠지만 가성비란 ‘가격 대비 성능’의 약자다. 영어로는 ‘cost-effectiveness’쯤 될까? 우리가 가진 시간과 재화의 양은 한정적이다. 아니, 항상 허덕인다고 하는 게 맞겠지. 한없이 부유하면서 한없이 여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러니 같은 양의 시간과 재화를 투자해, 물질이든 경험이든 이왕이면 더 좋은 것을 얻길 원한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다. 하지만 가성비가 삶의 모든 것이 되면, 아예 내 삶을 끌고 나가기 시작하면 곤란해진다. 사방에서 가성비 타령을 한다. 그놈의 가성비. 이 표현은 대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한 걸까? 처음엔 재미있고 센스 있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줄임말이네. ‘Case by case’를 ‘케바케’라고 줄여 말하는 것 같아.

 

그 귀엽던 가성비가 이제는 한국을 지배한다. 무언가를 선택하려는 순간, 가장 높은 우선순위가 되어버린다. 내 마음은 어떤지, 나는 뭘 원하며 어떤 걸 좋아하는지, 뭘 해야 내가 행복해지는지는 뒷전이고 일단 가격부터 묻는다.

 

‘이거 얼마지? 비싸네? 더 싼 건 없나?’

 

인터넷을 샅샅이 뒤진다. 혹시 비슷한 저렴이 상품은 없는지, 과연 이걸 사서 돈값 할 수 있을지, 뽕을 뽑을 수 있을지 예민하게 검색한다. 가성비가 최우선인 삶은 슬프다. 가성비가 최우선인 사회는 끔찍하다. 꼭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건 그다지 재밌거나 신나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두루마리 휴지 36개 한 묶음을 사는 게, 생수 2리터짜리 12개 묶음을 사는 게, 생리대 중형과 대형을 한 아름 사는 게 뭐 그리 재미있겠는가. 그런 소비 안에 대체 무슨 즐거울 만한 건덕지가 있겠느냐 이겁니다.

 

소비의 즐거움은 그거 없어도 사는 데 전혀 지장 없는, 세상 쓰잘데기 없는 걸 살 때 비로소 솔솔 피어난다. 이거 너무 예쁘다,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예뻐! 오, 냄새 되게 좋다, 안 사도 되지만 향이 너무 좋아! 자그마하든 큼직하든, 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고르는 요런 물건이 주는 기쁨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런 소비를 한 날은 기분이 좋다. 두고두고 떠올리게 된다.

 

물건뿐인가, 경험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팬미팅, 확 꽂혀버린 뮤지컬 공연 2회차, 기다렸던 영화, 새로 나온 소설, 전시회, 짧거나 긴 여행…. 모두 가성비로만 따지자면 꽝일지도 모른다. 그치만 나는 지금 이렇게 행복하다. 가성비를 따져야 할 땐 따지고, 열심히 계산해 가며 아껴 모은 돈으론 가성비를 싹 잊고 즐기는 것이다. 이게 사는 거지!

 

‘창작’은 돈이 든다. 돈이 수시로 들어가는 행위다. 금덩어리를 주무르고 깎아 다이아몬드를 콕콕 박는 작업을 해서가 아니라(해보고 싶습니다), 돈이 종종 창작의 연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성 들여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아… 하고 기분 좋게 한숨을 내쉬어야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설렘을 느껴야 하며, 새로운 잠자리에서 말똥말똥 눈을 뜨고 외로움도 느껴야 한다. 때론 누군가와, 때론 자신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끊임없이 보고 누려야 한다. 우리 안의 우물을 촉촉하고 찰랑하게 채워야 한다. 그래야 취향도, 입맛도 더 예민해지고 새로운 창작 욕구가 피어오른다. 우리는 모두 창작자다. 좋은 문화를 누려야 좋은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선순환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사회가 제안하는 임금 수준이다. 꼭 필요한 것부터 합리적으로 소비한 후 남은 거로 인생을 즐기려는데, 잠깐만요, 어째 남는 게 없네? 그 결과, 입만 열면 ‘돈’이다. 그걸 빼고 다른 걸 논할 수 없다. 누구를 만나든 기승전돈, 때로는 돈승전돈, 심할 땐 처음부터 끝까지 돈돈돈돈.

 

심지어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을 두고도 가성비 이야기를 한다. 다른 나라에선 얼마를 썼는데 우리는 훨씬 싸게 했대, 그 돈으로 그 퀄리티를 뽑은 거래, 가성비 대박이지! 여보세요, 그게 자랑입니까. 그 이야기 속에 뭐가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싼값에 뼈와 살을 갈아 넣으며 과로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느냔 말입니다.

 

빠듯한 일정과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낸 것은 칭찬하되, 비상 상황을 헤쳐나간 후에는 그에 맞게 보상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시스템이며 제대로 굴러가는 사회다. ‘싼값에 잘했다’라는 표현에서 우리가 칭찬해야 할 부분은 ‘잘했다’지 ‘싼값에’가 아니다.

 

헝그리 정신요? 웃기고 있어. 나는 이 말을 싫어한다. 일은 시켜먹고 싶은데 돈은 제대로 주지 않으려는 쪽에서 주로 하는 소리다. 듣는 순간 경계해야 한다. 아끼고 또 아끼면, 최소한의 것만 자신에게 허용하면, 쪼들릴 대로 쪼들리면 숨은 쉴 수 있을지 몰라도 전혀 행복하지 않다. 미래를 꿈꾸기 어렵다. 뭐 하나 하는 데도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사소한 소비 실패에 크게 좌절하게 된다. 좌절은 분노로 이어진다. 잔뜩 날이 서고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우리의 물가는 너무 높고, 평균 노동소득 수준은 한심하게 낮다. 일을 하고 임금을 받아 그걸로 일상을 꾸리고 저축해야 하는데 말처럼 되지 않는다. 급여가 통장에 들어오자마자 신용카드 회사에서 빼가는 걸 한숨 쉬며 멍하니 바라본다. 사실 멍하니 바라볼 시간도 없다. 순식간에 자동 인출되니까. 그리고 남은 얼마간의 돈을 한 달, 30일로 나누어 하루 생활비를 가늠해본다. 삶이 피곤하다. 좋은 걸 봐도 좋은 줄 모르겠고, 웃기는 걸 봐도 웃음이 나지 않는다. 시니컬하게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피식하고 만다.

 

이 상황에서 창작을 이야기하라고? 배고픔과 고통은 창작에 필요한 작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부분’이어야 한다. 헝그리 정신을 들먹이며 창작자의 고통만이, 눈물의 짜고 쓴 맛만이 가치 있다 생각한다면 멸치 똥을 한 주먹 모아서 종일 씹어보길 권한다. 입에 잘 맞을 것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관리하고 삶 전반을 돌보는 일은 창작자에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을 끝없이 유지 보수해야 한다. 부디 가성비가 최고의 가치가 되지 않길 바란다. 배변 후에는 질 좋은 휴지로 항문과 성기를 닦고, 유해물질 없는 생리용품을 사용하고 싶다. 햅쌀로 밥을 지어 제철 재료로 만든 반찬을 곁들여 식사하고 싶다. 여름엔 냉방을, 겨울엔 난방을 하고 싶다. 생활 물가와 최저임금 사이의 한없는 간극이 좁혀지길 바란다. 최저임금은 결코 임금 상한선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부디 선택 사항이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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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 정확히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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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두 편의 글을 통해 뇌과학의 기초를 공부했습니다. 이 지식들을 바탕으로 ‘중독’이란 현상을 이해해봅시다. 앞의 글들을 읽지 않으셨다면 지금이라도 읽으면 좋겠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중독’이란 개념을 많이 사용합니다. 노래가 마음에 들어 자꾸 귓가를 맴돌면 “그 노래, 은근 중독성 있다”고 하고, 음식이 맛있을 때도 예컨대 “마약김밥” 같은 표현을 쓰지요. 중독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전에는 물질(술, 담배, 마약)만 중독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독이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임이 밝혀지면서 이제는 도박, 섹스, 게임, 스마트폰 사용 등 ‘행동’이 중독을 일으킨다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둘째, 중독은 늘고 있습니다. 물질중독 면에서는 술, 담배는 조금 줄지만 약물중독이 늘고 있지요. 더 문제는 행동중독입니다. 세상이 디지털화, 상업화되면서 갈수록 자극적인 컨텐츠를 팔거나 자극적인 행동을 부추겨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므로 행동중독은 계속 늘어날 겁니다.

 

 

술이 청소년의 뇌에 미치는 영향


우선 전통적으로 중독의 대표주자(?) 격인 술과 담배에 대해 알아봅시다. 술이 왜 나쁜지에 관해서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겁니다. 담배도 마찬가지지요. 새삼스럽게 술은 간이나 위에 나쁘고, 담배는 폐나 기관지에 나쁘다는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 아는 얘기잖아요. 그보다는 담배와 술이 뇌에 미치는 영향, 특히 청소년의 뇌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봅시다.

 

청소년의 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리해볼까요? 뉴런들이 마구 자라고 연결(시냅스)이 늘어나면서, 한쪽에서는 불필요한 뉴런들이 없어지는 가지치기가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기능을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능을 익히기 힘들어지는 수초화가 일어난다고도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청소년의 뇌는 어디나 ‘공사 중’입니다. 짓고 허물고, 다리를 놓고, 길을 만들고 넓히고 포장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초 공사가 잘못되면 이미 지어진 건물에 충격이 가해진 것보다 훨씬 큰 문제가 생기지요. 마찬가지로 뉴런들이 자라고, 연결되고, 정리되는 와중에 알코올이나 니코틴, 약물이 쏟아져 들어오면 뇌에 엄청난 충격이 됩니다. 뇌가 가장 빨리 발달하는 2세 미만 유아에게 술이나 담배를 주지 않지요. 그렇다면 뇌가 두 번째로 빨리 발달하는 청소년기에 술이나 담배를 하는 건 어떨까요? 세 가지 영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능은 유전자의 지배를 받습니다. 청소년의 뇌에서 뉴런들이 자라고, 없어지는 과정 역시 뉴런의 성장과 가지치기를 지배하는 유전자가 ‘켜지고 꺼지면서’ 진행됩니다. 그런데 알코올은 이 과정에 끼어들어 가지치기 유전자를 켜버립니다. 청소년도 술을 마시고 깨는 것을 보면 성인과 똑같습니다. 사실 간기능이나 대사가 훨씬 왕성해서 더 빨리 깨지요. 그러나 겉으로는 똑같아 보일지 몰라도 뇌는 성인보다 훨씬 큰 손상을 받습니다. 특히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라는 부위가 쉽게 손상되어 학습능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 마디로 머리가 나빠진다는 거지요.

 

두 번째로 술을 마시면 위험한 행동을 감행하여 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습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지만 청소년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전 글에 썼듯 충동은 강한데 충동 조절 능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요인도 있습니다. 역시 유전자 얘깁니다. 알코올은 DRD4라는 도파민 수용체 유전자의 스위치를 올립니다. 이 유전자는 ‘위험 감수 유전자’라는 별명이 있어요. 사람은 위험한 행동을 통해 쾌감을 추구하는 성향이 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위험한 행동을 별로 하지 않던 사람도 알코올에 의해 DRD4 유전자가 켜지면 위험을 감수하고 짜릿한 흥분을 맛보고 싶어집니다. 청소년의 뇌는 환경의 영향에 민감하기 때문에 위험한 행동을 감수하는 것 자체가 다시 뇌의 구조와 기능에 영향을 미치지요. 예, 기능은 물론 구조까지 바뀝니다.

 

마지막으로 술과 담배는 중독을 일으킵니다. 중독이 정확히 뭔가요? 1) 어떤 물질에 의존성이 생겨 자꾸 사용하게 되고, 2) 사용할수록 내성이 생겨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양을 사용해야 하며, 3) 끊으려고 하면 심한 금단증상이 나타나면 중독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중독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의지가 약해서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제는 중독이란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질병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전 글에서 설명했던 도파민과 보상중추입니다. 술과 담배 등 중독을 일으키는 물질들은 도파민 분비를 증가시켜 보상중추에 ‘중요한 것’으로 인식됩니다. 아예 도파민의 농도를 직접적으로 증가시키는 물질도 있습니다. 이런 물질들을 마약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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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뇌는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음식을 먹거나 섹스를 하는 것도 보상중추에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런 일에는 중독이 되지 않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도파민이 분비되어 갈망이 생기면 그런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 쾌락중추가 자극되어 즐거움과 만족을 느끼죠. 그러면 도파민 분비가 감소하여 갈망이 줄어듭니다. 그런데 어떤 물질에 중독이 되면 쾌락중추에서 만족을 느껴도 도파민 분비가 줄지를 않아요. 계속 갈망이 일어납니다. 결국 그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가족이나 친구보다 중요해지고, 먹거나 자는 것보다도 중요해집니다. 또한 그 물질을 떠오르게 하는 작은 신호만 있어도 뇌에서 도파민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옵니다. 중독이 자꾸 재발하는 이유입니다. 마약 중독자는 오래도록 치료를 받은 후에도 설탕이나 밀가루 등 하얀 가루만 보면 재발한다고 하지요. 술 마시거나 담배 피우는 장면을 매체에서 금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청소년의 뇌가 항상 공사 중이라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거예요. 청소년은 성인보다 중독되기가 훨씬 쉽습니다. 흡연량을 조사해보면 청소년이 성인보다 담배를 덜 피웁니다. 그런데 니코틴 중독률은 훨씬 높지요. 성인 알코올 중독자를 조사해보면 15-19세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사람이 가장 많아서 40%를 차지합니다. 마약, 도박, 게임, 포르노 등 모든 중독이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는 기름진 음식, 고도로 가공된 탄수화물, 그리고 설탕도 뇌에서 중독과 비슷한 현상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역시 청소년기에 이런 음식을 적극적으로 피하지 않으면 평생 갈망하고 탐닉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가 되면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전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죠. 물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속을 해도 하려는 사람을 막지는 못하지요. 개인이 올바른 정보를 알고 마음을 다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술이나 담배를 사용하나요? 사용하지 않는다면 뇌발달이 완성되는 25세 정도까지 계속 사용하지 마세요. 사용한다면 되도록 끊으세요. 혹시 사용량이 점점 늘거나, 술담배로 인해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면 부모님과 상의해서 바로 의사를 찾으세요. 중독은 하루 아침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일단 중독 상태가 되면 문제가 너무나 커집니다. 자신이 중독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빨리 알아차리고 빠져 나와야 합니다. 의사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술 한 잔, 담배 한 개비와 바꾸기에는 너무 중요한 기관입니다. 뇌가 곧 우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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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돈의 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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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안식년을 누리기로, 1년간 쉬어가기로 마음먹고 나니, 왠지 평소보다 더 용감해지고 과감해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1인 기업가인 프리랜서에게 안식년이란 곧 365일의 무급휴가고, 자칫하면 원치 않는 366일째 아침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니 무조건 내키는 대로 질러버릴 수는 없다는 얘기다.

 

자, 신중해지자. 레이아웃을 잡은 후 큼직한 그림을 그려 나갔다. 한곳에서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에서 한두 달씩 체류해보자 마음먹었으니, 지역별로 대략의 생활 물가를 검색해 데이터를 쌓고, 숙소와 항공권 비용을 더해 예산을 세웠다. 필수 경비를 산출하고, 적절한 비율의 여윳돈도 가늠했다. 당연하지만, 여윳돈이란 넉넉할수록 좋다.

 

그리고 돈을 모았다. 여행 작가로 오래 일한 만큼 여행 경비 모으는 것에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고 자부하지만(답은 오로지 적금뿐입니다), 중장기 체류 비용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와, 빡빡했어요. 하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여행이든 체류든 필요한 건 사실 두 가지다. 여권과 돈. 딴 거 없다. 그것만 챙기면 준비 끝이다. 한 해의 생활비를 모았다는 것은, 그 1년간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후의 일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안식년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용감해졌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용기’가 생긴 것이다.

 

일을 거절한다는 건 나에겐 참으로 굉장한 사건이다. 20년간 쉬지 않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제안을 거절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 거절은커녕, 작업 비용 흥정도 쉽지 않았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그다음 기회까지 사라질까 두려워, 기약 없는 나중을 위해 오늘을 인질로 잡힌 채 일했다.

 

그런데 1년 치 경비를 모아놓고 나니, 어차피 나는 곧 떠난다 이거야! 하며 용감해졌다. 뭐, 그래 봤자 무리한 일정의 일을 거절한다든가, 받을 만한 고료를 요구한다든가 등의 상식적인 행동들이다. 하지만 나에겐 큰 의미였다. 해달라는 대로, 일정이든 분량이든 혼자 끙끙대며 다 맞춰줬지만 정작 나에게 득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혼자 모든 걸 짊어진 프리랜서는 기댈 곳도, 마음 둘 곳도 없다.

 

그때까지 나를 옭아매던 일 하나를 그만두었다. 오랫동안 도돌이표처럼 수정을 거듭하던 일에서 손을 떼고,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그 작업 폴더의 바로가기 아이콘을 삭제했다. 일주일 전에 먹은 칼국수까지 싹 소화되는 것 같았다.

 

돈이 넉넉하다는 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지겠어, 뭐든 다 하겠어! 라는 것보다 이게 먼저다. 하기 싫은 일 안 하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봐도 되는 게 아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혹은 반대로, 여유가 생기고 나니 그 일이나 사람이 꽤 좋아지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이만큼 덜어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대체 돈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인가.

 

‘저희가 예산이 너무 없어서요’라며 고료를 깎는 대신 맛있는 걸 한턱내겠다는 업체 담당자를 종종 본다. 설마, 사비는 아닐 테고 법인카드겠지요? 전혀 반갑지도 고맙지도 않다. 그럴 거면 그 법카로 카드깡이라도 해서 단돈 만 원이라도 더 줬으면 좋겠다. 카드깡은 합법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이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지간히, 정말 어지간히 관계가 좋은, 오래되고 편안한 사이가 아니라면 굳이 차려입고 나가서 형식적인 안부를 나누며 식사하고 싶지 않다. 생각만 해도 명치가 쑤신다. 상대방 역시 결코 편하지도 즐겁지도 않을 것이다. 서로 네, 네, 하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겠지. 양쪽 모두 사회생활용 미소를 얼굴 가득 그윽하게 띄우곤 있지만, 담당자 역시 일개 직원일 뿐 오너가 아니잖아. 물론 해당 업체의 오너가 직접 왕림하시어 번쩍이는 법인카드를 기세 좋게 휘두른다 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때로는 심지어 흥에 겨운 나머지 나에게 감정적인 접대부 노릇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 쫌!

 

그러니, 그냥 돈 줘요.

 

내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당신네도 돈을 제대로 지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돈은 중요하다. 돈은 소중하다. 수고하셨어요, 반응이 좋더라고요, 라는 격려와 칭찬이 중요한 것만큼 돈도 똑같이 중요하다. 격려, 칭찬이 나의 지나간 수고를 감정적으로 보상한다면, 돈은 내가 오늘을 즐겁게 보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게 해준다. 돈이 있어야 뭘 하든, 아무것도 안 하든 할 수 있다.

 

돈 타령이라니 천박해,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어, 돈은 영원하지 않아. 소위 멘토라는 고고한 인간들은 이런 소리를 한다. 내가 언제 영원한 것을 바랬던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내 뜻대로 보낼 자유와 쾌적함을 원한다고 했지, 영원 타령을 했었나?

 

나는 나를 무척 사랑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아끼고 사랑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즐겁고 행복해질 방법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걸 실천할 돈만 있으면 된다. 그럼 내가 알아서 삶아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볶아 먹으며 셀프로 행복해질 테니까.

 

때도 몸을 충분히 불려야 잘 밀린다. 돈도 평소에 야금야금 써봐야 한 방 크게 쓸 때 제대로 지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아끼고 보살피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내가 열심히 번 돈은 내가 써야 하며, 나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 챙길 건 챙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그 돈 다 날아간다.

 

차곡차곡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것 같지만 내가 쓰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쓴다. 거참 희한하네, 좀 모았다 싶을 때면 왜 꼭 돈 나갈 일이 생길까 싶죠? 실은 다른 이들이 누울 자리를 보고 비비는 것이랍니다. 특히 비혼 여성의 경우, 집안의 돈주머니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넌 애도 없으니 여유 있지 않느냐는 건데, 여보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텐가!

 

주머니를 열기 전에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나는 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가? 과거의 회수율은 어땠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자의로 주머니를 여는 것인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것인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니라 돈이다. 돈이 있으면 용기가 생긴다. 돈주머니를 딱 쥐고 있어야 이거다 싶을 때 예스를, 아니다 싶을 때 노를 말할 수 있다. 더없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안식년 덕분에 여러 가지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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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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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본 이야기다. 아니다. 그냥 게스트하우스 이야기다. 나는 사실 게스트하우스를 불편해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람들과 계속해서 마주쳐서다. 인사를 해야 하고, 표정 관리를 해야 하고, 공동 공간에 사람이 없나 눈치를 봐야 하고, 모르는 사람하고 한 방에서 잠을 자야 하는, 그게 영 잘 안 된다.

 

하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게다가 더 나이 들어서는 바닷가 마을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을 묵는 것은 ‘어정쩡하게 들어갔다가 뭉클해져서 나오는 연극’ 한 편을 보는 일과도 같으며, ‘양산을 쓰고 나갔다가 때마침 급습한 소나기를 맞는 일’과도 같다.

 

일본의 야마가타(山形)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민타로 헛(Mintaro Hut : 뉴질랜드의 호수 이름을 딴 이름으로 뉴질랜드 여행에서 묵었던 동명의 게스트하우스를 만든 것)은 특별하다. 우선 매일 밤 주인장인 사토 히데오 씨가 요리를 한다. 손님들은 술을 사오거나 음식을 사와도 되지만 굳이 사오지 않더라도 그날 밤 술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 사토 씨의 요리 실력은 엄청난데 만두를 빚어서 요리로 차려내는 데 채 20분이 안 걸리고 고깃국이며 샐러드며 튀김 요리까지 못하는 게 없다. 먹는 걸 아주아주 좋아하는 사람 맞다. 그리고 또 나처럼 사람들에게 먹이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인 것도 맞다. 그래서 매일 밤 서너 명에서 많게는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음 보는 얼굴로 인사하며 술 한잔과 음식들을 가운데 놓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풀어놓게 된다. 어쩌면 여기까진 흔히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이야기 혹은 풍경쯤 되시겠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아니 술자리가 파하든 말든 밤 열한 시 무렵이 되면 히데오 씨는 슬그머니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약 10킬로미터에 이르는 저녁 산책을 하는 것. 하지만 무심히 그를 따라 나갔다가 그가 걷는 속도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술을 그렇게 마시고는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걷다니.

 

매일 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속도로 걷는 이유를 묻자, 쉽게 말해 ‘걷기 중독’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니 당연히도 마른 체형의 다부진 몸매를 가졌다. 한 며칠 그가 만들어준 요리를 ‘많이’ 먹고, 직접 설거지도 하고, 또 내가 직접 한국 요리도 만들고 하면서 그와 조금은 가까워졌는데, 실은 매일 밤 그의 산책에 동참하면서 부쩍 더 가깝게 되었는지도.

 

아니다. 음식을 차려 놓기만 하고 통 먹지를 않는 그에게 뭐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 한마디 때문에 더 그 사람을 가까이 지켜보자 싶었던 것인지도.

 

“왜 이렇게 음식을 안 먹죠?”하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랬다. “다 아는 맛인데요, 뭘.”

 

세상에나. 아는 맛이라고 음식을 입에도 안 대다니.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네요.”라고 되받아칠 수도, 그렇다고 까무러칠 수도 없는, 경지의 경지.

 

내가 딱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싶었다. 너무 많이 먹는 내가, 허기지지 않아도 음식에 코를 박고 먹는 나 같은 사람이 살아야 할 방향은 꼭 저것인데 싶어 슬쩍 약이 올랐다. 패자의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도 히데오 씨는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다. 술은 왜 그렇게 마시냐고 물으면 돌아올 대답은 뻔해서 안 물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답일 테니. “술은 마셔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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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면서 소소한 나만의 의식(儀式)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의식이라는 말은 말이 어렵지, 내겐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생일에 혼자 조용히 여행을 떠나기, 술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식물 꺾기, 높은 데 오르면 왜 좋아하는 사람이 떠오르는 건지 아무튼 떠올리기, 술잔, 커피잔 모으기, 한 사람 모르게 그 한 사람을 사랑하기, 사력을 다해 혼자 있는 시간을 버티기… 이 모든 것들이 의식에 해당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적으로다 적적함과 심심함을 당해낼 길이 없으므로. 그리고 그런 의식들은 자주 축제로 발전되기도 하는데 그렇게라도 혼자서, 최대한 조용히 나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종자의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렇다면 먹지 않는 히데오와 걷기만 하는 히데오가 살아가는 방식도 ‘의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나는 추측하고 싶다.


민타로 헛에는 60대의 남성, 네 명이 묵고 있었다. 삿포로에 살고 있는 두 명의 남성이 도서관에서 따분히 고문서를 들춰보다가 생각난 듯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오래전 동창에게 전화를 건 것으로 이번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네 사람은 야마가타 대학교 동창이었는데 17년 만에 만나 야마가타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것으로 그렇게나 죽여놨던 청춘의 한 때를 꺼내보려는 것 같았다. 대학 교정을 찾았으며 천문대에 올라 별을 봤으며 불쑥 후배의 집을 방문해 후배를 놀래 주기도 했다.

 

이분들과의 술자리는 즐거웠다. 쌍방의 호기심이 단초였겠으나 나는 그들이 음악적 취미를 배경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이 몸담았던 대학 밴드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궁금해 했다. 마침 두 사람은 기타를 들고 여행을 왔고, 한 사람은 리코더를 챙겨 여행을 왔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세 사람의 영향으로 이번 여행에서 급히 리코더를 샀다고 했다. 나는 취한 김에 부채질을 했다.

 

“그러니까 내일 밤에 콘서트를 여는 거예요. 분명 아름답겠죠?”


한 사람이 대답했다.


“아, 우리더러 연습을 하라는 말이네요.”

 

그리고 이틀 후 연주회가 열렸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새 A4 용지에 볼펜 글씨로 연주회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팀의 이름은 사쿠란보 리코더 콰르텟(사쿠란보는 ‘체리’를 뜻하는 말로 초여름의 야마가타는 체리가 풍년인 시기). 게스트하우스는 고급스런 클래식 음악 연주를 시작으로 이리저리 불꽃이 튀었다. 가만히 놓아둔 젓가락과 술잔들이 여진을 이기지 못하고 울렸다. 이내 나는 슬퍼졌다. 아름다운 것 앞에서 슬퍼지자는 것이 나의 의식이려니, 나의 축제려니 나는 그렇게 먹먹해졌다. 그날 밤, 그곳으로 모든 별들의 기운들이 다 모여들고 있었다. 단지 한여름의 난로만 가만히 쉬고 있었다.

 

초로의 사내 넷이 연주하는 것은 음악이 아니라 인생의 의미였을 것이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찬사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때 삿포로에서 온 사내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가 이렇게 되어서, 아무런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불쑥 여기 와서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어요. 등을 떠밀려 연주도 했지만 연주를 잘 못한 것만 빼고 정말 이런 시간이 있다는 게 놀랍네요. 한 번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이젠 한국도 가고 싶어졌어요. …삿포로에 오면 나를 만나 주겠어요?”

 

늦은 그날 밤, 히데오 씨와 나는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는 채 가시지 않은 분지의 열기로 가득한 밤길을 서둘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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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만의 시그니처를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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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futurekept.com

 

 

가게든 사람이든 브랜드이든 자신만의 고유한 시그니처가 중요하다. 시그니처의 유무야 말로 아이코닉한 무엇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다. 미국 애플사는 사과, 이를 만든 스티브 잡스는 이세이 미야케의 검정 터틀넥과 뉴발란스 992는 시그니처의 중요성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다.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의 높은 카라부터 유재석의 슬림 슈트, 주커버그의 후줄근한 후드, 김어준의 산발한 수염과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패션을 넘어 모두 시그니처라 부를 수 있다. 쉽게 말해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살자는 이야기다.

 

물론, 쉽지 않다. 이미지메이킹이 감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시그니처룩은 단순한 코디나 랩머니의 산물이 아니라 자존감의 고취와 내면과 마주한 성찰과 더욱 관련이 깊다. 다른 사람에게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각인시킬 수 있으려면 이미 단단히 퇴적된 취향이 있거나, 그 어떤 유행과 주변의 수군거림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이 묵직하게 서 있어야 한다. 의도할수록 더 멀어지는 게 진정한 멋의 본질인 것처럼 시그니처는 계산할수록 촌스럽거나 경박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시각에서 후각으로 눈금을 맞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타크 가문의 늑대, 라니스터가의 황금 사자, 타가리옌가의 드래곤, 툴리 가문의 잉어처럼 우리도 모든 집안마다 고유의 향을 갖고 있다. 흔히 말하는 집 냄새 말이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 놀러가거나 부동산을 통해 집을 보러 다닐 때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한옥이든 주상복합이든 마찬가지이고 공기청정기의 유무와 상관없는 것을 보니 환기 및 주거 형태는 집 냄새와도 큰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먹는 것, 위생의 기준, 세탁세제 등등 라이프스타일과 결부된 결과다. 그러니 집 냄새와 체취야말로 일상과 일생이 체화된 진정한 나만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부모의 품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은 전월세나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공간에 자기만의 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능하면 향기를 풍기는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자. 아무리 어글리 패션의 시대라고 해도 담배 쩐내, 땀 냄새, 퀴퀴한 곰팡이 냄새, 오래 묵어 뒤섞인 화장품 냄새, 홀아비 냄새 등을 시그니처로 삼고 싶은 이는 없을 거다. 일상은 그저 반복되는 쳇바퀴가 아니라 애정을 갖고 가꿀수록 아름다워지는 정원과 같다. 그래서일까. 매일 매일이 파란만장했던 나폴레옹은 외출 때마다 콜론을 3~4병씩 들이부었다고 한다.

 

나만의 집 냄새를 위해 추천하는 아이템은 디퓨저다. 샤워 습관이나 빨래 주기까지 말하면 객쩍은 잔소리가 될 것 같아 생략한다. 최소한 현관, 화장실, 옷방(옷장)에는 꼭 디퓨저를 두길 추천한다. 악취에 가장 취약한 공간이자 향의 존재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누릴 수 있는 곳들이다. 뭐 결국 대부분의 공간에 놓자는 말인데, 신나는 건 집이 좁을수록 자신만의 향을 갖기가 훨씬 용이하다는 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가볍고 달콤한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언제나 인기다. 나 또한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아쿠아 유니버셜을 메인 향수로 쓰기 때문에 집 안 방향제도 어느 정도 계열에 맞춰 편안하고 산뜻한 향을 골라 둔다. 향수와 디퓨저의 향을 동기화하면 재미는 좀 덜하겠지만 확실한 시그니처를 완성할 수 있다.

 

디퓨저는 액체향료(오일)가 담긴 용기에 나무로 만든 막대기(리드)를 꽂아 향을 발산하는 제품이다. 리드는, 자연산 등나무나 갈대로 만든 게 좋으며 수명은 보통 1개월이다. 디퓨저 용액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거나, 향이 희미해질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리드를 뒤집어 꽂거나 바꾸도록 한다. 디퓨저를 처음 사용할 경우 가능한 리드를 4개 이상 꽂지 않도록 한다. 과하면 역하다.

 

사실, 디퓨저 이야기만큼은 피하려고 했다. 왜냐면 수용 가능한 가격대도 천차만별이고, 수많은 소상공인이 뛰어드는 소규모 제조 유통 분야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원하는 제품을 만났다고 해도 수급상의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 게다가 다분히 취향의 영역이다. 그래서 내가 쓰지 않는다고 해서 양키캔들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식의 부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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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디퓨저는 성수동이나 망원동의 공방 제품부터 명망 높은 니치 브랜드까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이를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유럽에서 온 유서 깊은 조향회사 브랜드 제품과 일본, 포틀랜드, 호주, 샌프란시스코, 브루클린 등의 힙스터 동네에서 날아온 아날로그 감성의 공방형 제품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국내에도 천연, 수제를 내세운 방향 시장이 성장했다. 개인적인 추천 브랜드는 월리, 산타마리아노벨라, 라우라, 프라고나르, 리나리, 펜할리곤스, 크리드, 아포티케, P.F 캔들 등등인데, 이외에도 훌륭한 브랜드는 언제나 질 좋은 디퓨저를 생산한다.

 

이런 브랜드의 디퓨저에는 인공향료와 같은 석유화학 추출물이 적게 들어가지만 기본 베이스가 에탄올이란 점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구매하기 전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한 위해우려제품 안전기준’에 적합한 검사를 통과했는지 꼭 확인한다. 수제, 천연이란 말에 유혹 당하면 안 된다. 수제란 조잡하다는 단서일 수 있고, 굳건한 카르텔이 존재하는 조향업계에서 값싼 천연은 마케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들르신 적이 있었다. 아들 사는 집을 한 바퀴 둘러보시더니 다른 말씀 대신 집에서 웬 화학약품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미간을 찡그리셨다. 디퓨져만큼은 소비자 가격을 고려하지 않고, 늘 신경 쓰고 살았음에도 이렇단 말이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부모님의 집 냄새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확인 받은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향초나 향은 디퓨저의 좋은 대안이다. 다만, 불 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고, 특히 향초는 알려진 것보다 공간을 지배하는 방향 능력과 지속성이 떨어진다. 즉, 향초로 집 냄새를 구축하려면 돈이 좀 많이 든다. 반면, 향은 의외로 쓸모가 많다. 음식을 하거나 집 안이 눅눅할 때 피우면 도움이 되고, 옷방에서 주기적으로 향을 피우면 오래된 향수, 땀, 체취 등에서 우러나오는 일상의 잡내를 가려준다. 룸스프레이도 이런 역할을 한다. 옷장에 4~5회 칙칙 뿌리고 문을 닫아두길 반복하면 옷에 향이 밴다. 단, 실내 습도가 60% 이하인 건조한 날에만 그리 하도록 하자. 마음에 드는 향이 있다면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왁스 태블렛도 훌륭한 선택이다. 디퓨저를 놓기 힘든 서랍장 같은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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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쳐다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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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쳐다보지 마세요.”

 

퇴근 후 “아빠 다녀왔어요.” 인사 건넸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여느 때처럼 한껏 애정을 담아 아이를 바라봤지만 아이는 고개를 돌렸다. 문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아빠 아빠” 외치던 아이인데. 짜증날 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했지만 아내 얘기로는 잘 놀고 있었다 한다. 폭염에 녹아내린 몸을 씻어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다가가 아이를 안았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아빠 만지지 마세요.”

 

분명 내가 아이 마음을 상하게 했구나 싶었지만,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지안아, 아빠가 지안이 쳐다보고 지안이 안는 게 싫어요?”


“응”


“왜 싫어요?”


“……”


“지안이는 아빠한테 섭섭한 게 있어요?”


“네. 아빠가 같이 안 놀아요.”

 

아이가 태어난 이후 이틀 연속으로 같이 놀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이번 주에 처음으로 연이틀 못 놀았다. 하루는 오랜만에 저녁 회식이 있었고, 그 다음 날은 써야 할 원고가 있어서 저녁을 먹고 카페로 나갔던 터다. 평소에 많이 놀아왔으니 이틀 정도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나야 퇴근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와 있으니 ‘많이’ 논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에게는 긴 하루의 끄트머리에야 나타나 ‘잠시’ 노는 존재가 아빠였을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이틀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지안아, 아빠가 미안해.

 

아이의 마음을 알고 나서 평소보다 좀 더 열심히 놀았다. 아이를 이불 위에 눕혀서 흔들흔들 비행기 태워주고, 요리 장난감으로 샌드위치와 케잌을 만들어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접하며 놀았다. 블록으로 큰 병원을 만든 뒤에는 대체 몇 명의 친구를 치료해주었는지 모르겠다. 동료 의사가 된 우리는 호랑이를 수술하고, 코끼리에겐 물약을, 하마에겐 알약을 처방했다. 배가 아픈 곰돌이와 이가 아픈 악어, 꼬리가 아픈 여우를 고쳐주었다. 무엇보다 아이의 서운함을 깨끗하게 치료했다. 다시 두 팔 벌리며 “아빠, 사랑해요” 와락 안겼다.

 

아이가 보채거나 서운함을 토로하는 일은 아이를 키우는 집에선 일상적인 일이다. 직장에 다니는 부모가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가지기 어려운 것은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 너무도 만연한 현실이다. 혼자 유난 떨 소재는 전혀 아니다. 때로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아이도 적응해야 한다. 어필할 때마다 보상을 주는 것이 바람직한 대처라고 할 순 없고 그러기도 힘들 것이다. 아이가 다시 마음을 여는 것을 느끼며 흐뭇하면서도 고민이 생겼다. 이런 상황이 다시 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내의 복직을 코 앞에 둔 우리에게, 이런 날들은 수없이 찾아올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엄마를 마주했던 아이는 엄마없이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씽씽이나 자전거를 타며 어린이집으로 가던 풍경에도 엄마는 없다. 엄마도 아빠처럼 하루의 끄트머리 즈음에 얼굴을 내밀 것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핀을 꽂을지 엄마에게 요구하던 일, 미세먼지 신호등을 보고 엄마에게 ‘오늘의 공기’에 대해 얘기하던 일, 엄마와 냇가의 물고기를 바라보던 일, 하원 후 동네 커피숍에서 엄마는 커피를 아이는 딸기주스를 앞에 두고 건배하던 일 같은 것은 주말에나 가능할 것이다. 세 살 아이에게도 이제 '추억'이라 부를만한 시절이 생긴다.

 

엄마와 아빠가 퇴근하기까지, 주말이 오기까지, 아이의 마음 속에는 어떤 요구들이 차곡차곡 쌓일게 분명하다. 아마도 아이는 “쳐다보지 마”하며 관심을 호소하거나, “잠이 안 와”하며 밤 늦게까지 같이 놀자고 엄마 아빠를 조를 거 같다. 엄마 아빠는 각자 방전된 채 퇴근해서, 역할을 나눠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를 끌고 국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내 놓은 뒤에야 아이와 온전히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중압감에 눌린 우리는 때로 아이의 요구를 손쉽게 들어주거나, 규칙과 좌절도 배워야 한다는 이유로 아이의 요구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 갈팡질팡할 게 눈에 선하다. 그 갈팡질팡의 시간을 어떻게 현명히 극복할 수 있을지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보지만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언젠가 메모해 두었던 구절이 눈이 뜨였다.

 

우리는 일상의 중압감에 눌려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대화를 회피할 때가 많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장 적게 논의한다. -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중에서

 

아이가 무언가를 요구하는 순간만 보자면 엄마 아빠가 때로는 아이의 요구에 충실히 반응하지 못하고, 어느 때는 과하게 반응하기도 하며, 어느 때는 아이의 태도를 바꾸려고 달려드는 등 오락가락하게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요구가 제기되는 순간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는 것은 아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가장 적게’ 숙고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순간은 정답대로 행동할 수 없더라도, 평소에 꾸준히 아이와 관계를 맺는다면 아이의 불만족도 덜하지 않을까. 정작 겪게 되면 쉽지 않겠지만, 대단히 특별한 방책도 아니지만, 아내의 복직을 앞두고 생각해 본다. 어떤 비법을 꿈꾸며 손쉽게 해결하려 하지 않겠다고. 평소에 늘 아이에게 마음을 쏟겠다고. 네가 잠든 후에도 너의 마음을 생각하겠다고.



 

 

인생의 발견시어도어 젤딘 저/문희경 역 | 어크로스
시대와 공간의 교차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고민해왔는지, 또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일깨워 주며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더 나은 해법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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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느슨한 완벽주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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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완전한 문장을 만들기 전엔 외국어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지겹게 외운 대로 “만나서 반갑습니다”까지는 하겠는데 그다음이 문제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과거형인가 미래형인가, 전치사는 뭘 써야 정확할까, to 부정사 이렇게 쓰는 게 맞나 하며 머릿속이 엄청나게 복잡해진다. 쪽팔리게 괜히 헛소리하느니 입을 다문 채 눈만 껌뻑껌뻑하고 마는 식.

 

20년쯤 전에 형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형부는 미국 사람인데, 언니를 만나고 연애하며 한국어를 조금씩 배웠다. 바짝 긴장해선 언제나처럼 딱딱한 교과서 말투로 첫인사를 하고, 고르고 고른 문장으로 어렵게 대화했다.

 

그런데 실은, 당시에도 이미 나는 영어에 꽤 자신이 있었다. 뉴스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데 큰 문제가 없으니 뭐, 그 정도면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형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듣기만 하고 내 이야기는 거의 하지 못했다. 가족이 될 사람인데, 궁금한 게 무척 많았는데… 아휴, 답답해.

 

어느 날 형부가 한국어로 말했다.

 

“예희, 나 한국말 잘 못해요. 내가 바보 같아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누가 무슨 시비라도 걸었나! 깜짝 놀라 절대 그렇지 않다고,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되물으니 형부가 다시 말했다.

 

“예희도 그래요. 그러니까 그냥 영어 해도 돼요.”

 

‘완벽하기’란 과연 가능한 일일까? 완벽이란 게 존재하기나 할까? 아닐 거다. 그런데도 그 불가능한 것 때문에 스스로 쿡쿡 쑤시고 괴롭힌다. 결혼할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겠다며 가벼운 데이트, 부담 없는 대화에도 철벽을 친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차피 다 치우지 못할 거라며 잔뜩 쌓인 쓰레기를 애써 외면한다.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겠다는 것. 노래도, 그림도, 춤도, 연설도, 글도, 영영 내 것을 내놓지 못한다. 스케치북을 펴고 펜 뚜껑을 열었지만 일단 점 하나를 콕 찍고 나선 ‘으- 이게 아니야!’라며 부욱 뜯어버리고는 다시 텅 빈 페이지를 펼친 다음 망설이는 식이다.

 

하지만 그 점에서부터 시작해도 좋다. 작은 점을 덧칠해 크게 만들어도 좋고, 가늘거나 굵은 선을 똑바로, 혹은 구불구불하게 그려 나가는 것도 재미있다. 나는 그게 좋다. 새 종이에서 시작하든, 헌 종이를 재활용하든, 내가 하려는 것은 어차피 점을 찍고 선을 그어 면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림도, 글도, 노래도, 요리도,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된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썼고, 영어 책을 번역했다. 뭐든 다시 펼쳐보면 어이구야, 싶게 민망한 부분이 튀어나온다. 그 시기에 주로 쓰던 말투와 철 지난 유행어에 몸이 배배 꼬인다. 직접 찍고 그린 사진과 일러스트레이션도 다시 보니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다. 야, 이땐 내가 이랬구나 하며 하하하 웃은 다음 다시 책을 덮어 책꽂이에 꽂아두고 그다음 일을 한다.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영원히 서툴 것이고, 뭘 하든 새로울 것이고, 어리버리할 것이다.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좀 편안해진다.

 

일하는 과정을 좋아하지만, 작업물에 너무 커다란 의미를 두는 걸 경계한다. 과정을 즐기되, 결과에 대해선 어느 정도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이고, 의뢰인이 존재하며, 그의 요구에 맞추어 작업한 것이니 내 쪽에서 지나치게 작가적인 고집을 부리는 건 소모적이며 불필요하다.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되,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만든 걸 내 새끼, 내 자식이라 부르며 그 안에 자신을 지나치게 담아버리면 곤란하다. 그럼 정말이지, 아주 금방 지쳐버릴 것이다. 말은 쉽지만, 노력이 필요하다.

 

순수예술 장르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든 비평가든, 누군가는 그것을 소비한다. 각자의 시선으로 보고 느끼고 평할 자유가 있다. 그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건 왜곡이에요,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요’라는 소리를 해 봤자다. 물론 의도적으로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도 있으나 내가 이야기하는 건 일반적인 비평과 의견 개진이다. 어쨌든, 내 손으로 만든 것이 이제 나를 떠나 다른 이에게 간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잘 떠나보내자.

 

떠나보내는 의식은 중요하다. 이걸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 그다음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좋은 평가는 좋아서, 나쁜 평가는 나빠서 내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지난번처럼 잘해야 하는데, 혹은 지난번처럼 또 말아먹으면 안 되는데, 라며 모든 기준이 그놈의 ‘지난번’이 되어버린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자꾸 발목을 잡힌다. 계속 꺼내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내가 이런 색을 칠했네, 이런 문장을 썼네, 이런 맛을 냈네. 그런데 지금은 왜 안 될까? 난 쓰레기야. 앞으로도 계속 이 모양일 거야… 안 되죠, 안 됩니다. 그 어두운 상상이 실제가 되지 않도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갑시다.

 

나는 이럴 때 햇볕을 쬐는데, 동네를 두 바퀴쯤 돌며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달콤한 걸 사서 집에 돌아와 커피나 홍차를 준비한다.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 들여 차를 만들고,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잔에 담아 마신다. 리셋 버튼을 눌러, 한 번 껐다 켜는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열정이 어느 순간 식을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배우고 일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온종일 그 생각만 나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마저 아까울 때도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쭉 이어지진 않는다(이어져도 곤란하다). 영원히 절절 끓지 않는다. 위로 쭉쭉 치솟던 열정 그래프의 각도가 어느 순간부턴가 완만해져 수평에 가까워지는데, 때론 땅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20대엔 열정이 버글버글 끓고, 30대엔 그 열정의 원석을 캐어 잘 다듬어 값을 올린다. 그리고 40대로 접어들면… 슬슬 더는 예전 같진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 이제 끝이냐, 내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냐, 나는 이제 가치 없는 인간이냐, 전혀 아니죠. 슬슬 또 새로운 재밋거리를 찾아가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고요.

 

하던 걸 그만두는 게 곧 패배와 실패를 뜻하진 않는다. 그동안 쏟아부은 열정, 노력, 시간, 돈이 아깝고 억울해 억지로 계속하는 게 오히려 어리석다. 내가 내 발목을 잡는 셈이다. 고냐 스톱이냐,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 내가 나와 합의를 봐야 한다. 그동안 할 만큼 했고 이제는 됐어, 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 끝낸다. 끝을 내야 그다음을 시작할 수 있다.

 

혹은 하던 걸 계속하되, 내 자세가 달라진 것을 받아들인다. 20대, 30대에 거친 파도를 짜릿하게 타고 달렸다면 이젠 잔잔함을 즐길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잔잔하게, 꾸준히 내 페이스로 가겠다는 것. 결국 우리는 길게 가야 한다. 굵으냐 가느냐 하는 건 그다음 문제다. 길게 가기 위해선 탄력과 복원력이 필요하다. 손으로 꾸욱 누른 자국이 다시 쑤욱 솟아올라야 한다. 푹 자고 일어나, 어제의 기분에서 벗어나 새로운 날을 시작해야 한다.

 

완벽을 추구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대신 내 속도를 스스로 정하는 사람이 좋다. 그렇게 되기 위해 오늘도 마음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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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생활자, 고뇌에 찬 창작자라는 신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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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는, 예술가는, 기타 등등 하여간 이런 일(무슨 일?)은 싹 다 괴로운 것이야! 불면으로 밤을 꼴딱 새우고, 땅 밑으로 꺼질 듯 우울하고, 하는 일마다 뼈를 곱게 갈아 넣지! 전화기는 당연히 꺼놓는 거고, 마감을 앞두곤 잠적해야 제맛이지! 머리든 수염이든 털이란 털은 길게 기르고 1년에 몇 차례, 명절을 맞이해 대대적으로 몸을 씻지! 술?담배에 절었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피눈물로 빚어낸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지!

 

…네, 지금까지 여러분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를 잠시 엿보셨습니다. 다양한 미디어가 합심해서 만들어낸, 별로 근사하지 않은 신화. 어머, 어디서 썩은 냄새가 나네…?

 

나는 일상을 알차고 차분하게 꾸려 나가는 게 좋다. 가능한 한 길게, 가능한 한 오래 잘 먹고 잘살고 싶다.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성을 지금보다 더 높일 수 있을지 궁리한다. 창작자의 고통이니 파괴니 자학이니 따위가 들어오면 좀 곤란해진다.

 

오늘 일이 좀 힘들었더라도 일단 여기까지, 라며 적당히 맺고 끊어줘야 오늘 밤도 꿀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개운하게 일어나 새로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지만 마음만은 자체 출근과 퇴근을 하며 출근 카드를 드르륵 찍는 것이다.

 

무슨 창작자가 그렇게 건전하냐고, 그래서야 너무 가벼운 작품이 나오는 것 아니냐고? 글쎄요, 72시간쯤 깨어 있는 상태로 다양한 향정신성 약물과 알코올성 음료, 담배를 끊임없이 삼키고 피우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나올지 궁금하다. 하지만 직접 해보고 싶진 않다. 혹시 해보신 분 계시면 효과가 어땠는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에게 잘해주고 싶다. 내 몸뚱이와 멘탈을 가능한 한 곱게 아껴 쓰고 싶다.

 

물론 일이란 건 만만치 않고, 때로는 곱게 자란 입에서 쌍욕이 나올 만큼 힘들다. 하지만 힘든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따라 얘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다음 1과 2를 비교해보자.

 

1. 아악 힘들어! 이 일 끝나기만 해봐, 맛있는 거 먹을 거야!!!
2. 너무 힘들다… 이 길 끝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저 암흑만이 나를 기다릴 뿐….

 

나는 단연 1번이다. 달콤한 보상을 눈앞에 대롱대롱 매달아놓고 달리는 쪽이 좋다. 작은 목표를 달성한 후 맛있게 홀랑 따먹고, 잠시 쉬고, 그다음 일을 한다. 2번 같은 식이라면 이 생활, 이거 오래 못한다. 일하면서까지 굳이 피를 볼 생각을 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생리할 때마다 피는 실컷 본다.

 

스스로 응원하고, 분위기를 띄워야 한다. 으아 빡세다, 그렇지만 어서 해치우고 개운해지자, 라는 흐름으로 가야지 처음부터 고통… 암흑… 자기파괴… 크큭… 으로 접근하면 일의 수명이 훅 짧아지기 쉽습니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창구를 통해 접한 창작자, 예술가의 모습이란 으레 위에서 묘사한 대로였다. 엄청나게 극적인 생활환경, 온갖 고난과 역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흙 속에서 반짝이는 천재성을 지닌 인물! 이런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젖은 미역처럼 골고루 몸에 두르고 있어야 진정한 창작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평탄하게 살았다. 평범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곱게 자랐고(그런데 ‘곱다’는 게 대체 뭘까?), 부모님께선 용돈도 부족하지 않게 주셨다. 일도 뭐 그냥 열심히 했고요… 라고 하면 이게 대체 무슨 드라마 주인공 감이 되겠습니까. 재미없죠.

 

그래서 흉내 내기로 했다. 내 주위에 어둠이 없다면 손을 쑥 뻗어 확 끌어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첫 번째는 술과 담배. 그게 제일 쉽다. 그리고 합법이다(향정신성 약물은 곤란합니다 여러분). 술도 담배도 하나같이 맛대가리 없고 구역질이 치밀어, 혼자 있을 땐 하지 않다가 방청객이 있을 때만 열심히 마시고 뻐끔뻐끔 피웠다. 주량은 소주 네 병, 담배는 하루 두 갑이라고 거짓말했다. 봤냐, 내가 이렇게 퇴폐적이고 막 나간다고! 어때, 좀 예술가 같지?

 

그런데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고 다양한 일을 하며, 정말로 힘든 순간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멍청하고 한심한 짓을 했다는 걸. 고통은 흉내 낼 수 없으며 훈장도 아니다. 1초라도 빨리 벗어나야 한다. 평범하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불행 배틀, 정말 할 짓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다면, 우리에게 밝은 면이 많다면 감사히 여기고 잘 써먹자. 고통 속의 창작자에게서 고통을 거둔다면 그는 행복한 창작자가 될 것이다. 고통이 바로 나의 자양분이지, 이게 바로 진정한 예술가의 길이지! 라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현재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디어에서 멋대로 왜곡한 탓이 크다. 그놈의 고뇌하고 자학하는 불행한 예술가 캐릭터!

 

우리는 자신에게 너무 박하고 가혹하다. 뭐 그렇게 대단히 개성적이고 드라마틱한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 별일 없이 심심하게 지내는 게 실은 꽤 어렵다. 별일 없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노력을 스스로 칭찬해주자.

 

꾸준히 일해서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고통에 중독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며 프리랜서도 마찬가지다. 원활한 커뮤니케이션과 적절한 리액션, 상호 간의 신용은 사회생활의 기본 중에서도 상기본이다. 그런데 나만의 세계, 나만의 고통에 잔뜩 취해 있는 프리랜서 창작자와 대체 불안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한두 번 데이고 나면 계속 함께 일할 마음이 사라진다. 일만 그런가,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당신의 자식(혹은 연인, 친구)인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창작을 한단 말입니다아아아! 라며 열 번 정도 진상을 부리고 나면 이게 누구 손해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대체 뭔 놈의 대단한 창작 나부랭이를 한다는 것인가? 사죄의 의미로 아메리카노 기프티콘이라도 보내자.

 

한편, 업계의 선배격인 창작자가 슬그머니 나에게 고통을 종용할 때도 있다. 너는 너무 어려, 세상을 몰라,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해, 쿨해져야 한다 이거야 등등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일단 경계하는 것이 좋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에 너무 주목할 필요 없다. 그저 그의 방식일 뿐이다. 본인의 음침한 경험을 무기 삼아 상대방을 조종해 다양한 착취를 시도하는 경우가 많으며, 상당 부분 성적 착취로 이어진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든, 업계에서의 위상 차이가 얼마나 나든, 상대방의 기를 죽이면서 관계를 시작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작자가 아니다. 조종이고 통제이며 세뇌인 것이다.


 

안녕하세요, 신예희입니다.


<신예희의 독립생활자>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2회의 연재를 마무리하며 인사를 올립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귀한 지면에서 연재할 수 있어 무척 기쁘고 행복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 그에 어울리는 사진과 그림을 고르는 과정이 모두 즐거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쓴 글은 곧 한 권의 책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의 사랑을 받고 싶고, 많은 분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습니다. 저는 계속 행복하게 재미있게 살겠습니다. 맛있는 것 많이 먹으면서요.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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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스마트폰에도 중독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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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 뭔지 복습해 봅시다

 

예전에는 1) 어떤 물질에 의존성이 생겨 자꾸 사용하게 되고, 2) 내성이 생겨 같은 효과를 얻으려면 점점 많은 양을 사용해야 하고, 3) 끊으려고 하면 심한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면 중독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중독이란 도파민과 보상중추를 중심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생각하게 됐지요. 중독에 대한 개념이 변하자 크게 두 가지가 달라집니다.

 

첫째, 옛날에는 중독을 도덕적 문제나 의지가 약해서 겪는 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질병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예전에는 물질만 중독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특정 행동이나 경험도 뇌에서 똑같은 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제는 행동도 중독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2013년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는 마침내 행동을 중독으로 인정합니다. 바로 ‘도박중독’입니다. 올해 6월에는 WHO에서 게임중독을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으로 규정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사용은 아직 주목 대상에 올라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청소년 게임 셧다운 제도를 시행 중이지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중독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도 논란이 치열합니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정상적인 행동을 질병으로 규정하여 불필요하게 사회적 낙인을 찍게 된다는 점을 염려합니다. 하지만 인터넷 게임은 중독으로 볼 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WHO에서 질병으로 규정한다는 건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도파민과 보상중추가 관여한다는 증거가 충분히 쌓였다는 뜻이지요. 게임에 빠져 학교생활이나 친구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망가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봅니다. 게임방에서 며칠씩 먹지도, 자지도 않고 게임을 하다가 사망하는 경우도 가끔 보도되지요.


게임이 중독으로 인정된다면 많은 변화가 뒤따를 겁니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게임에 중독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깊게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19세가 되었으니 셧다운에 신경쓰지 않고 실컷 게임을 즐기자”라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청소년의 뇌는 항상 공사 중이라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했지요?
19세면 사회적으로는 청소년이 아니지만, 뇌는 25세까지 청소년으로 봐야 합니다.청소년은 성인보다 중독되기가 훨씬 쉽습니다. 술이나 담배는 어른보다 훨씬 적은 양에도 쉽게 중독됩니다. 마약, 도박, 게임, 포르노 등 모든 중독이 마찬가지입니다. 게임에도 당연히 쉽게 중독될 수 있고 의외로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인지적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인터넷, 특히 스마트폰 문제는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중독이란 말에 대해서는 정색을 하고 반대하는 분이 많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관계맺기 방식으로 봐야 한다는 거지요. 청소년들이 하루 종일 학교에서 학원으로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 스마트폰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들 뺏을 수 있겠느냐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조그만 스마트폰 속에는 전화, 카메라, 사전, 수첩, 계산기, 손전등 등 수많은 유용한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스마트폰으로 결합되면서 엄청난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제 폰 안에는 책이 3천 권 정도 들어 있습니다. 도서관을 세계 어디든 갖고 다니는 셈입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난생 처음 가보는 곳도 즐겁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매일 부모님께 안부를 전하고, 커피숍에 앉아 글을 쓰고, 식료품을 주문합니다. 그러니 스마트폰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보다 훨씬 다양하게 활용하는 청소년들에게 스마트폰을 뺏는다는 건 감옥에 가두는 것과 비슷한 고통을 줄 겁니다.


하지만 불안한 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청소년의 뇌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의학적 증거들이 쌓이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그렇지 않아도 타인의 감정이나 형편을 헤아리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우리 뇌 속에는 거울뉴런이란 것이 있습니다.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을 관찰하고 해석하여 공감과 동정심을 일으키는 데 관여한다고 생각되는데 역시 청소년기에 큰 변화를 겪으며 완성됩니다. 하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는 청소년은 이러한 ‘인지적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공감 능력이야말로 사회에서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측면이란 점을 생각한다면 걱정스럽지요.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까톡!)을 듣고 확인하거나, SNS에 ‘좋아요’ 개수를 확인하고 싶어 조바심을 낼 때 도파민과 보상중추가 작용한다는 증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에도 중독될 수 있을까요?


영국의 작가 요한 하리(Johann Hari)는 중독에 관한 감동적인 테드 강연 중에 이렇게 묻습니다. 할머니들이 대퇴골 골절로 수술을 받으면 며칠간 통증을 줄이기 위해 모르핀을 씁니다. 말이 약이지 사실은 헤로인과 똑같은 마약입니다. 그러면 할머니들은 퇴원한 후에 모두 마약 중독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죠. 마약 중독에 관해 알려진 많은 사실은 쥐 실험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쥐 한 마리를 우리에 가두고 한쪽에는 그냥 물을, 다른 쪽에는 마약 섞은 물을 놓아두면 항상 마약을 먹는다는 거죠. 그러나 이후 ‘쥐 공원(rat park)’이라는 실험이 행해집니다. 넓고 쾌적한 우리에 공이나 터널 등 다양한 놀이거리를 갖추고, 먹을 것도 많이 넣어주고, 따뜻한 잠자리도 만들어준 후 여러 마리의 쥐를 함께 넣어 준 겁니다. 그랬더니 마약 섞은 물을 먹는 쥐가 거의 없더라는 거지요.

 

할머니들이 병원에서 마약을 투여받아도 중독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들은 가족을 만나고, 퇴원하기를 기다리던 친구들과 쿠키와 커피를 앞에 놓고 수다를 떨고, 산책을 다녔던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보람 있는 일이 있고, 서로 다정한 눈길과 대화를 나눌 친구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강력한 마약을 줘도 잘 중독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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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일 때, 잘 때만이라도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 놓자


이런 교훈을 스마트폰에 대입해보면 안심과 우려가 동시에 생깁니다. 안심이란 스마트폰 좀 쓴다고 중독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지요. 우려는 이겁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느라 사랑하는 가족, 소중한 친구,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과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것도 연결 방식입니다. 아예 고립되는 것보다 낫지요.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방에서 건넌방으로 카톡을 날리는 식의 연결이 아니라, 한 마디라도 서로 눈을 바라보며 다정한 마음을 실어 나누는 대화입니다. 먹을 것이 아무리 풍족해도 우리 몸이 여전히 칼로리를 지방으로 바꿔 저장하듯, 맘모스를 향해 돌진할 일이 없어도 청소년의 뇌는 여전히 짜릿한 위험을 추구하듯, 아직 우리는 디지털로 연결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아요.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가 정작 소중한 사람들 사이에 단절을 가져왔다는 역설을 생각하며, 스마트폰에 관해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


1. 움직일 때는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지 마세요. 지하철을 환승하기 위해 걸어가는 계단에서, 사람이 붐비는 거리에서,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변에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무서운 병이 많지만 사고만큼 무서운 건 없습니다.


2.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밥을 먹을 때는 스마트폰을 내려 놓으세요. 잠깐씩이라도 디지털 휴식을 가지면 스마트폰에 의해 도파민 회로가 활성화되고 거울 뉴런이 억제되는 효과가 크게 줄어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따뜻한 눈길, 말로 나누는 대화, 사소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3. 잘 때는 스마트폰을 다른 곳에 두거나 꺼 놓으세요. 잠은 신체와 정신 건강에 너무나 중요합니다. 청소년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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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을 판단하는 바로미터, 식기건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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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셜록은 상대의 옷차림을 슬쩍 보고 성향과 살아온 역사, 매력 등의 인물 됨됨이 파악하곤 했다. 물론, 그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영국 런던에 살았다. 현대적인 의복이 기틀을 갖춘 시기긴 하지만 당시에도 귀족 계급은 엄연히 존재했고, 남성복이 지금처럼 캐주얼해지고 군복의 영향을 많이 받기 전이었다. 따라서 옷차림과 아이템으로 어느 정도 출신과 직업군과 재력과 매력을 파악하기가 지금보단 용이했을 거다. 그런데 뭐, 아이폰을 갖고 다니는 셜록도 이런 데 능한 걸 보면 시대를 초월한 능력인 것 같기도 하다.

 

셜록과 달리 발렌시아가나 구찌 혹은 메종 키즈네나 파타고니아처럼 어쩔 수 없이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옷차림만으로 타인의 성향과 매력을 파악하는 눈썰미는 내게 없다. 다만,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면 싱크대와 그 주변을 흘깃 보면서 그 공간에 대한 나름의 정리를 끝낸다. 내게 있어 싱크대는 셜록의 옷차림만큼이나 누군가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다.

 

사는 모습이 결국엔 다 비슷비슷하다는 명제는 씽크대 위에서 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싱크대와 그 주변의 정리정돈 상태를 눈여겨보면, 집 안의 나머지 공간을 구지 보지 않더라도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공간과 일상에 애정이 있는지, 하루하루를 그저 고되게 보내고 있는지 아니면 가꾸는 재미를 느끼는지, 몇 명이서 생활하는지, 미적 감각과 성실함, 섬세함은 어떤지 대략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경제적 수준과 살아온 환경까지도 가늠할 수 있다.

 

오랜 사용감이 느껴지는 씽크대라도, 그 위에 깨끗이 빨아 반듯이 널어놓은 행주가 기분 좋게 만드는 집이 있는 반면, 어떤 신축 오피스텔에서는 싱크대에 달아놓은 아코디언 문을 열자말자 설거지 산사태를 겪은 경험도 있다. 정상과 찬장의 거리는 불과 10센티미터 미만이었다. 컵라면 용기 안에서 나무젓가락이 뗏목이 되어 떠다니는 설거지 더미나, 먹다 남은 부대찌개를 냄비 째 개수대에 던져 넣고 그 위에 밥공기와 반찬 그릇이 이리저리 쌓여 있는 참혹한 참상도 목격했다.

 

매력적이라 생각되는 싱크대는 고급빌라나 주상복합에나 있다는 이탈리아나 독일산 고가의 디자이너 제품이나, 한샘 키친바흐 시스템 같은 게 아니다. 백조(baekjo)든 콜러((Kohler)든 일단 개수대는 언제나 깨끗하게 비워져 있어야 하고, 식기건조대에 설거지 거리가 잘 정리되어 올라가 있어야 한다. 이런 성실함과 일상을 가꾸는 노력을 미덕으로 치는 이유는, 세상이 그래도 살만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특출 난 재능과 매력, 세상을 뚫어보는 혜안이 있는 자만큼 많이 먹지 못하더라도,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간 사람들에게 오늘의 하루가 내일과 미래를 살아갈 담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의 발로다.

 

그래서, 나의 경우 결코 틈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즉각적인 설거지는 물론, 허연 물방울 자국이나 물때의 물결은 덕지덕지 붙은 고단한 삶의 흔적처럼 느껴져서 개수대의 물기도 때때로 제거한다. 음식물 찌꺼기는 당연히 매번 정리한다. 쌓이면 미루는 것이 살림의 섭리라는 것을 잊지 말자. 음식이 식을지언정 요리하다 나온 설거지부터 먼저하고 밥을 먹는 습관이 들어 있다 보니, 손님을 초대할 땐 종종 항의를 듣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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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d52.com

 

 

설거지가 습관의 영역이라면, 씽크대는 설비의 영역이다. 원활한 설거지 생활과 주방의 품위를 원한다면 사실 어느 정도 물리적인 투자가 필수불가결하다. 허나 씽크대는 쉽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가구가 아니다. 그 대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용과 만족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적절한 식기건조대의 구비다. 싱크대는 마음대로 바꿀 수 없어도 식기건조대는 마음먹기 나름이다. 아무리 설거지를 열심히 하고 마른 행주로 닦아놓는다고 해도, 구조적으로나 미적으로 불완전한 싸구려 식기 건조대 위에 얹으면 정갈한 미는 결여되고 살림의 굴레에 함몰되게 된다. 아무리 인테리어를 멋지게 해도 살림이 들어오는 순간 황이 되는 게 이런 경우다.

 

우린 종종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사용하는 필수품일수록 이상하게 하대하며 돈을 아끼는 경향이 있다. 매일매일 사용하는 데다 주방의 표정을 간단한 터치로 드라마틱하게 바꿔주는 식기 건조대만큼은 결코 가벼이 여기고 실수를 하면 안 된다. 부지런히 설거지를 해도 그 성실함이 공간의 분위기로 승화되지 않는다. 주방에 있어 식기 건조대의 존재감은 다 된 화장에 재를 뿌릴지, 화룡정점을 찍을지를 결정하는 립스틱과 같은 거다.

 

좋은 식기 건조대란 물때에 강해서 변색이 적고, 녹이 잘 슬지 않으며 공간 활용도가 높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 빠짐 기능, 즉 건조 기능이 탁월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위생적이며 사용감이 더해질수록 중후해지는 스탠 소재를 추전한다. 아예 플라스틱이나 실리콘 제품도 캐주얼한 인테리어엔 적합하다. 다만 스탠과 플라스틱이 섞이면 조잡해 보인다.

 

추천 브랜드는 라 바제(La Base)다. 세련되고 날씬한 첫인상과 달리 올 스텐이다보니 대형 제품의 경우 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육중한 무게를 자랑한다. 고급 스탠 냄비에 주로 쓰는 18-8 스테인리스강을 주재료로 만들어서 녹과 물 자국에 매우 강하며, 그릇 꽂이를 따로 설계하지 않은 대신 굉장히 촘촘한 살이 특징이다. 접시 꽂이가 없어 불편한 경우도 있지만 그 덕분에 더 깔끔하게 공기류나 조리도구들도 정리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는 모퉁이를 우아하게 살짝 접고 물기가 떨어질 수 있게 경사를 준 받침대다. 코팅까지 완벽해 물기를 바로바로 떨군다.

 

참고로,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비슷한 디자인의 무인양품 제품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단, 물 자국 얼룩이 훨씬 더 잘 생긴다. 그 외에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나라 주부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심플휴먼의 제품도 고려할 수 있다만, 개인적으로는 너무 헤비하다고 생각한다. 원룸의 경우 조셉조셉(Joseph Joseph)의 익스텐드 식기건조대가, 식구가 많다면 프리미엄랙스(PremiumRacks)의 프로페셔널 디쉬 랙도 좋은 선택이다. 특히 이 두 모델은 리뷰닷컴(reviewed.com)에서 꼽은 2018년 올해의 식기건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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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스마트폰, 중독만 무섭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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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우리 몸에는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삶의 양(quantity)을 결정하는 건 폐와 심장이다. 그러나 삶의 질(quality)을 결정하는 건 뼈와 근육이다.” 무슨 뜻일까요? 오래 살려면 폐와 심장이 튼튼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가 쉴 새 없이 아프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리 오래 산대도 반갑지 않겠지요? 그냥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삶의 양보다 질이 문제라는 거지요. 삶의 질을 높여주는 건 튼튼한 뼈와 근육입니다. 뼈와 근육이 아프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누르거나 마우스를 조작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스크린을 ‘터치’하거나, ‘밀어서 잠금 해제’하거나, 작은 조작 버튼을 능숙하게 눌러 가며 게임을 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입니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조작하는 일이 힘들다고는 생각하지 않죠. 하지만 그렇게 ‘무해한’ 동작이라도 계속 반복한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앉고 서고, 걷고 달리고, 물건을 들어올리고, 위를 쳐다보며 열매를 따고, 높은 곳에 오르고, 붙잡고 매달리고, 춤추고 헤엄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은 수천 수만 가지 동작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한 가지 동작만 끝없이 반복하도록 만들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하루 종일 앉아있거나, 스크린을 쳐다보며 마우스를 클릭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처음에 2kg짜리 아령을 들어요. 그러다 힘이 붙어 5kg, 10kg짜리로 올립니다. 무거운 아령을 들수록 근육이 더 빨리, 많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50kg, 100kg짜리 아령을 들면 어떻게 될까요? 들기도 어렵지만, 억지로 들면 근육이 찢어집니다. 운동이 되는 게 아니라 손상을 입는 거지요. 이처럼 우리 몸에는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 이하로 운동을 하면 몸에 좋지만, 한계를 넘어서면 다칩니다. 근육만 그런 게 아니라 눈이나 귀 등 감각기관, 심장이나 콩팥 같은 내장기관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을 너무 크게 들으면 청력이 나빠지고, 소금을 너무 많이 먹으면 심장이나 콩팥이 망가지는 원리입니다.

 

자극의 크기에만 한계가 있는 게 아니에요. 반복 횟수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팔굽혀펴기를 20-30번하면 몸에 좋지만, 억지로 200-300번하면 다칩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건 어떨까요? 키보드를 누르거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터치’하는 것도 몸에 해로울까요? 반복 횟수에 달려 있습니다. 너무 자주, 쉴 틈 없이 반복하면 해롭습니다. 해로운 정도가 아니라 평생 엄청난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점점 늘어납니다. 처음에는 중년에 접어든 사무직 직장인들이 문제였지만, 차차 젊은 사람 중에도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늘더니 이제는 청소년, 심지어 어린이들도 통증, 이상감각, 뻣뻣함, 피로감을 호소합니다. 아이팟 손가락(iPod finger), 플레이스테이션 엄지(PlayStation thumb), 닌텐도염(Nintenditis)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문제를 의학적으로 반복사용 긴장손상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쓰는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게임을 하고, SNS를 하고, 숙제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웹툰을 보고… 깨어있는 동안은 계속 쓴다고 해야겠지요. 키보드를 누르거나, 클릭하거나, 터치하는 건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닙니다.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러나 같은 동작이 계속 반복되고 중간에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으면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 무리가 옵니다.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손상, 즉 미세손상(microtrauma)을 입게 되지요. 말 그대로 ‘미세’한 거니까 몇 개 생긴 걸로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몸은 손상을 입으면 즉시 수습에 나섭니다. 손상 부위로 혈액을 많이 보내기 위해 혈관이 확장되고, 특수한 화학물질들이 분비되고, 백혈구들이 몰려들어 찌꺼기를 청소하지요. 이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다친 부위에 열이 나고, 붓고, 빨개지고, 아픕니다. 이걸 ‘염증’이라고 합니다. 그 자체는 괴롭지만 사실 염증은 몸을 치유하려는 노력입니다. 가벼운 염증은 완전히 회복되어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염증이 심하면 가라앉고 나서 그 자리에 흉터 조직이 들어찹니다. 흉터 조직의 문제는 정상 조직에 비해 딱딱하고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거지요. 유연성이 떨어지면 조금만 자극이 가해져도 찢어집니다. 미세손상이 반복되기 쉽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됩니다. 미세손상을 입은 곳이 점점 늘어 수백, 수천 곳에 이릅니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을 겪습니다. 손이 아프고, 자고 일어나면 붓고, 따끔거리거나, 쉽게 지치거나, 예전에는 거의 없던 오타가 자주 나기도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아픈 곳을 주무르고, 밤에는 아파서 잠을 설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집중이 안 되고, 한 시간도 안 걸릴 일을 몇 시간씩 붙들고 있게 됩니다. 정말 무서운 건요, 당사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는 걸 끝까지 부정한다는 겁니다. 손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팔꿈치까지 짜릿한 통증이 느껴져도 계속 페이스북에 댓글을 달고, 몇 시간씩 게임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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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10대의 습관이 평생 나쁜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질병

 

왜 그럴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게 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클릭이나 터치가 엄청난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머리 속에 들어 있지 않고, 자신이 겪는 통증과 피로감이 ‘미세손상’에 의한 것이라는 개념을 아예 모르기 때문에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죠.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현상을 아는 것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팔이 아프면 체육시간에 무리를 해서 그런가, 주말에 가구를 옮겨서 그런가 하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갖다 붙입니다.

 

또 한 가지는 증상이 왔다갔다한다는 겁니다. 미세손상은 ‘미세’하므로 조금 쉬면 증상이 가라앉습니다. 진통제를 먹으면 더 빨리 좋아지지요. 좀 나아지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거봐, 좋아지잖아!” 이런 일이 반복되면 통증, 부기, 불편함에 적응이 됩니다. 아프고, 뻣뻣하고, 저려도 그러려니 하고 게임과 스마트폰을 계속 사용합니다. 악화되는 길로 들어서는 거죠.

 

마지막 이유는 자기변명입니다. 성인 중에는 컴퓨터를 쓰지 못하면 당장 생계에 지장이 생기거나, 직장에서 일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청소년은 부모님께 야단 맞을까 봐, 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그만 쓰게 될까 봐 증상을 외면합니다. 일종의 ‘중독’이지요. ‘중독’이란 말이 차별적이고 편견을 조장한다고 질색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의사가 보기에 그런 소리는 속 편한 허영에 불과합니다. 페북에 댓글을 달고, 카톡 메시지에 득달같이 답을 하고, SNS에 올린 글에 ‘좋아요’가 달리는 것을 확인하는 행위에는 중독적인 쾌감이 동반됩니다. 게임에서 상대를 꺾거나, 목표를 성취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마우스를 클릭할 때 깜짝 놀랄 만큼 손이 저려도 모니터 앞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그게 중독이지 뭔가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억지로 뭔가를 못하게 하는 건, 예를 들어 몇 시 이후에는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한다든지 하는 조치는 어리석은 거예요. 옳고 그름을 떠나 효과가 없지요. 그런 식으로는 행동을 고칠 수도 없을뿐더러, 삶에서 겪는 수많은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헤쳐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문제의 해결은 진실을 정확히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해요. 그러니 스스로를 속이고 계속 지금의 습관을 밀어붙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봅시다.

 

증상이 계속 심해지는데도 게임과 스마트폰 사용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증상이 만성화됩니다. 사용하지 않을 때도 계속 아프고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통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문 손잡이를 돌리거나 단추를 잠그는 등 기본적인 동작조차 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요. 어깨와 목의 통증, 두통도 너무 심해서 어떤 사람은 “내 몸에서 탈출하고 싶어요”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래도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반복사용 긴장손상 증후군이야말로 10대의 습관이 평생 나쁜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질병입니다. 죽는 병은 아니지만 삶이 너무나 불행해지지요. 아무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소한 동작에 의해 생긴다는 점이 더욱 무섭습니다. 명심하세요. 반복되는 동작은 몸을 망가뜨립니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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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으로 최대의 효과를 만드는 일상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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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mporary-Desk-Lamp-White

 

 

아마도 초등학교 3~4학년 때였던 것 같다. 부모님이 우리 3남매에게 각자 개인 책상을 사주면서 생에 처음으로 나만의 공간이란 자각이 생겼다. 권투선수의 리치, 검도선수의 칼날의 반경처럼 그 책상은 약간의 공부와 잡서 탐독 및 음악 감상,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나만의 체계와 질서로 움직이는 세계, 내가 간택한 아이템들만이 숨을 쉬는 또 다른 세상의 역사가 시작됐다. 책상 위로 솟은 책꽂이형 책장은 난공불락의 산성과 같았고, 메인 서랍장의 시건 장치는 내 세계의 영혼을 굳건히 지키는 지하 비밀 금고였다. 이 왕국에 허락된 인물은 나만이 유일했고, 어머니의 걸레질도 웬만해선 허락하지 않았다.

 

책상은 피노키오사의 제품이었다. 책장과 스탠드까지 한꺼번에 갖춘 일체형 책상이었는데, 책장 아래에 흰색 네모난 형광등 박스가 달려 있던 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이 박스에는 형광등 스위치와 110볼트짜리 콘센트도 하나가 달려 있었다. 가구에 빌트인 된 전면 콘센트라니, 살면서 마주한 적 없는 신문물이었다. 미적인 측면에서나 기능적인 측면에서나 날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독서실 책상의 가정용 버전일 뿐이지만 독서실이란 것 자체를 몰랐던 내게 천장에 달려 있는 형광등이 책상에 달렸다는 것만으로도 전기의 발명에 버금 갈만큼 신기한 문명의 이기였으며 르네상스의 시작이었다. 그 덕분에 부모님 신경을 보다 덜 쓰고 잠을 미룰 수가 있었고, 나만의 세계를 비추는 조명의 안온함 속에서 하나 둘 삶에 애착이란 걸 갖게 됐다.

 

일반 형광등에서 삼파장 형광등으로 바뀌는 세월 동안 나는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고3까지 그 책상 앞에서 보냈다. 그 후 대학 기숙사, 원룸, 옥탑방, 85제곱미터의 반전세집을 거쳐 일본 맨션 사향으로 3DK의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이사 갈 집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책상을 놓을 그럴듯한 자리였고, 새로운 공간에 애정을 두는 첫걸음도 책상을 가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회사 중역의 사무실이나 대문호의 서재처럼 장엄하거나 우주선 조종석 같은 첨단 기계가 가득한 그런 것이 아니라, 방 한 구석에 조그맣게 박혀 있더라도 세상살이의 무게와 현실의 퍽퍽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익숙하고도 편안한 무드가 중요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기거하면서, 가장 애를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이기도 한 만큼 책상은 집 안의 그 어떤 곳보다도 코지(cozy)한 정서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런데 기숙사와 원룸 생활을 통해 독립하다보니 미니멀 라이프는 취향이 아니라 숙명이었다. 자연스레 책상 자체보다는 그 위에 놓이는 탁상 스탠드를 통해 분위기를 잡아가는 길을 걸었다. 멋진 책상을 갖출 생각보다는 책상 벽 옆에 둘 벽걸개나 책상 위에 붙일 선반, 책장, 장식품 등에 더 많은 관심을 할애했다. 돌이켜보면 책상 자리, 그 분위기, 그리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은 책상 자체의 물성에 대한 관심보다 내 시야 공간만을 오롯이 비췄던 피오키오사의 형광등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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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탁상 조명에 관심을 두게 된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기숙사와 월세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다른 건 주어진 환경에 적응에 산다고 하더라도 책상 위만큼은 내가 만들어갈 수 있는 최소 단위의 개인 공간이다. 집 안이 온통 동남아 가게나 오징어잡이 배처럼 환한 주광색 일색이라고 해도, 책상 스탠드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과 빛과 온도를 가진 조명으로 나만의 분위기를 가져가는 게 가능하다. 감성이 투영된 오브제면서 일상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탁상 스탠드는 기본적으로 존재감은 있되, 질리지 않는 무던함과 튀지 않는 모던함을 갖춰야 한다. 괜히 일이 잘 될 것 같은 전문가의 작업 공간 같은 분위기도 살짝 풍겨야 하고, 오랜 기간 함께한 친구 같은 변치 않는 편안함과 눈 건강과 피로 같은 기능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고가의 스탠드는 가성비가 나쁜 편이다. 아무리 가치를 높이 산다 해도 지엘드나 카이저이델 같은 주물 제품에 몇 십, 혹은 백 만 원 가까이 주고 사기란 쉽지 않다. 눈 건강을 생각하면 마음을 바꿀 필요도 있으나 아직까지 내 공간에 라문의 아물레또 스탠드처럼 <스타트렉>에서나 나올 법한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은 들이고 싶지 않다. LED 등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건 알고 있지만 학생이나 직장인 책상에 있을 법한 플라스틱 등도 피하고 싶다. 만약, 눈 건강을 가장 중히 생각한다면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개발했다는 발뮤다의 데스크 스탠드를 눈여겨보자. 무엇보다, 워낙에 카피가 많아 뭐가 카피인지도 모를 지경이지만 오픈 마켓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저가형 제품과 원작 사이의 아우라는 가격 이상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유념하자.

 

특별한 선호가 없다면 시작은 클래식으로 하는 편을 권한다. 관절이 꺾이고 스프링이 달려 있는 일명 ‘제도 조명’ ‘작업등’ 등으로 불리는 제품을 추천한다. 전통적인 디자인이고 어떤 작업 공간에서도 어울린다. 사대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왠지 프레피룩처럼 느껴져서 괜히 글이나 작업이 잘 될 것 같고 뭔가 역사가 깃든 것 같고 그렇다. 제도 조명에 관심이 간다면, 에코백의 제왕 마가렛 호웰도 즐겨 쓴다는 영국의 앵글포이즈 제품을 가장 무난하게 추천한다. 검색해보고 가격에 화들짝 놀랄 수도 있겠다. 그런 배신감을 느낀 독자들을 위해 가성비를 가장 우선으로 고려하면 이케아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여유로운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은 세계적인 범용성을 띄는 데다 값에 비해 재질과 만듦새가 떨어지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튀지 않는다. 다만, 이케아 스탠드는 전현무 집부터 우리 옆집까지 광범위한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염두에 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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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급속히 나빠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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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아름답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에게 가족은 그저 하나의 단위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한 후배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나는 습관처럼 그날의 배우자를 후배와 동격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 그날의 주인공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며, 역시도 절대 모르는 영역일 것이, 결혼한 사람은 파도에 몸을 실어야 하지만 그 주변의 사람은 여파에 몸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

 

내가 어떤 식으로든 한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끌림과 시간의 쌓임에 의해 벌어진 절친한 관계이겠지만, 그 사람이 맞이한 남편 혹은 아내 혹은 아이까지 포함한다면 그것은 쉽지 않다. 그전처럼 혼자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내와 아이까지 만나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힘들고 만다. 어렵게 만든 시간인데 뭔가에 집중한 것도 아닌데다가, 이것저것 신경 쓰다보면 만신창이가 되는 형국.

 

‘가족’하면 우선 떠오르는 두 개의 일화가 있다. 물론 아주 힘이 들었던 경우였다. 동년배 작가의 시상식 뒷풀이 자리였다. 문단에서는 문학상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어지는 경우가 100%. 술집의 상황에 따라 테이블은 떨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테이블에 따라 이야기는 각양각색으로 이어지기 마련. 물론 술자리의 테이블 사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엉망이기 마련인데, 그날 주인공인 작가의 아내로 추정되는 처음 본 사람이 나에게 호통을 친 것이다. 문제는 그날 수상작이 실린 책 한 권을 모든 하객들에게 증정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고 내가 대화를 하던 중에 수상작품집을 꺼내 보다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이 두 번째 문제라면 문제. 맥주 피처에서 흘러내린 물기에 그 책 표지가 젖은 걸 보고는 작가의 아내가 불쑥 다가와 하는 말은 이랬다.

 

“아니, 이 책이 어떤 책인데… 책이 다 젖었잖아요.”
“아, 미안합니다. 제가 모르고 그만…”
“조심하셨어야죠. 오늘 문학상 받은 수상작이 실린 책이잖아요.”

 

내가 잡아 든 책을 그녀가 다시 잡아채더니 자신의 옷소매로 한번 닦은 뒤, 받으려고 내민 내 손을 무시하고 내 옆 자리에 던지듯 놓고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마음이 급속히 나빠졌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날이 되어서야 작가의 아내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저러려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니, 이 책이 어떤 책인 줄도 알고 당신 남편이 대단한 것도 알고 상금이 많은 것도 알겠는데, 난 여기 올 시간이 안 되는데도 애써 축하해 주려고 왔어. 그러니까 나는 노력 중인 거라고. 책에 뭐가 묻었든 그 책은 내 책이잖아. 당신 남편이 상을 받은 것이, 이렇게 당신 남편보다 못 쓰는 나 같은 작가가 있어서 나 대신 남편이 상을 받기도 한 것이니 그렇게 당당하게 나를 꾸짖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따위의 구린 감정을 참느라, 그럼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느라 고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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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은 음악하는 남자 후배의 아내에게 연락이 온 것인데 몇 번 같이 어울리긴 했었지만 대뜸 ‘한번 보자’는 거였다. 후배가 출장중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후배가 돌아왔나 싶어 후배도 동석을 하는 건지 확인을 할까 하다가) 내게 직접 연락한 것을 존중하자 싶어 의무를 앞세워 그냥 나갔다. 만나자는 이유는 단지 ‘시인하고 술 한잔 해보고 싶었어요’ 라는 것.

 

헛… 음… 이 역시도 존중할 부분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심은 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싶어 시 이야기를 조금 꺼냈지만 내가 후배에게 전해준 시집은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것 같았고,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시인도 화장실에 가냐’며 전근대적인 흉한 질문을 하길래 질식할 것 같아 한숨만 쉬다가 자리를 급히 마무리했던 기억. 보통의 사나이들은 이런 경우, 집에 돌아오면서 벽에다 주먹을 친다는데 나는 내 손이 아까워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

 

결혼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파문을 일게 하는구나. 이전과는 달리 감당해야 할 것들이 관계의 뿌리를 뻗어나갈 수 없게 만들고 마는구나. 그 후로 그 두 사람만 보면 마치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아내의 얼굴들과 마주 앉은 기분이 들면서 큰 새가 부리로 심장을 콕콕 쪼는 듯했다. 나는 그 일로 (무시해도 된다면 아내는 빼고) 나와 직접 연관된 두 사람의 점수를 약 60점이나 깎아내렸다. 그렇게까지 하는 나라는 사람도 참 10점도 안 되는 인간이구나 싶은 것이, 나는 어떠한 사람하고도 살지 말아야겠구나 싶은 것이, 약속을 한 사람이 갑자기 가족 때문에 못 나오겠다고 하면 마음이 쓰라린 것이, 예민하고 명민하던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부터 감각을 어디 도둑맞기라도 한 것인지 갑자기 곰처럼 둔해져버린 사람을 못 참겠는 것을, 고개 끄덕이며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글쎄… 나는 나를 곰곰 생각하다가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결혼하지 않아서겠는데. 그전엔 전혀 안 그랬던 사람이 가족을 만들고 나서 연락이 없거나 연락조차 끊어버리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나는, 그래, 단지 삼각구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 원해서 삼각을 만드는 경우는 없다.

 

삼각만큼이나 관계에 있어서의 수직도 싫다. 관계에 있어 감정의 비율 또한 ‘나란히’가 좋다. 감정의 비만도 싫다. 그러니 나는 내 옆에 나란히 무엇을 두어야 할까.

 

칼을 품고 다니는 무사처럼 나는 겨우 도장이나 가지고 다니는 사람인 것 같다. 그 도장으로 내가 만나야 할 사람임을 정하고 사랑할 사람인가를 리스트 안에 들여놓기도 하지만, 그 도장을 사용해 더 이상 피로감 때문에라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구분하고 떼어낸다. 하지만 그런 도장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내가 가진 도장의 인주가 특별히 조금 진한 것일 뿐. 그것이 나의 ‘위태롭지만 달콤한 혼자만의 시간’을 지키기 위한 철학나부랭이쯤이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세상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뿐이다(I’m just trying to see the world from different angles)’ 라고 했던 닉 나이트(Nick Knight)의 말은 나에게 “나는 단지 세상을 좀더 지독한 혼자로서 바라보는 것뿐이다”로 바뀐다. 지독한 혼자라서 하늘이 유난히 푸르게 보일 것이고, 음악이 저릿저릿하게 들려와 마음이 너덜너덜해질 것이고, 자유는 무자비하게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랄 맞은 혼자인 채로 혼자가 아닌 세상 모든 이들에게 왜 혼자가 아니냐는 물음은 참을 것이다. 그 어떤 결과를 바라서는 아니겠지만 나는 이 가을을 좀더 잔혹하고 괴팍한 외로움으로 지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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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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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많아졌다. 책에서 아이를 떠나 보내는 장면이 나올 때, 아픈 아이들의 얼굴이 TV화면을 가득 채울 때 여지없이 울컥한다. 차량에 방치된 아이 기사를 읽었던 여름날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납품 주문을 처리했고, 지난 달 붕괴된 유치원 소식에도 안도의 눈물을 떨궜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를 직접 낳지 않은 내 몸에,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그저 놀랍다. 아이가 태어난 후 2년 남짓 흘린 눈물의 총량이 그 전 20년간 흘린 눈물의 총량을 이미 넘어선 것 같다. 아이와 그 부모들의 마음이 상상되면서 타인과 나 사이 경계가 일순간 허물어진다.

 

타인의 고통에 관해 생각하다가, 이런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워하다가, 부끄럽게도 내 생각은 자기만족으로 이어진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온 마음으로 공감하고 있는 내가 슬쩍 괜찮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고통조차 자기만족의 근거로 삼아버리는 무례가 내 안에서 작동하곤 한다. 이 무례를 자각하는 순간 다시 예를 차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무례를 인식하며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자신이 또 흡족하다. 나는 만족의 근거를 계속 투입해줘야 하는 유형의 사람인 것 같다. 이런 나를 깨닫게 되면 혹시라도 누가 알까 싶어 속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되뇌어 보지만 그 역시도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행위일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물은 금방 마른다. 브라운관에 나열된 이미지들, 슬픔과 분노의 기사들을 읽는 동안 샘솟던 눈물은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연결 짓는 일에 쓰이지 않는다. 강이 하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풍부한 유량을 뽐내듯, 수많은 원인들이 결합해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하류에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눈물도 터져 나온다. 공공의료나 보육정책, 교육정책, 가계 소득의 양극화 같이 아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요소들이 상류에서 이미 결정되는 순간, 내 눈은 그저 건조하게 뉴스를 훑고 지나갈 뿐이다. 내 눈물은 문제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 작은 힘이나마 모으는 일로 나아가지 못한다. 비로소 내가 못마땅하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만족의 자원으로 소모하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무례하지 않고 의미있게 공감하고 싶다면 스스로의 과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 내 삶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슬쩍 끼어드는 생각이 있다.

 

“내 아이는 나보다 나았으면…”

 

무의식 중에 자주 아이의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어느 방향으로든 잘 자라라 생각하는데도 내가 원하는 아이의 모습이 꽤 구체적으로 우후죽순 솟는다. 공놀이를 잘하면 좋겠어. 캐치볼은 물론 둘이서 족구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 대형쇼핑몰이나 테마파크 뿐만 아니라 적막한 폐사지를 사랑할 수 있는 아이였으면. 요즘은 유튜브와 스낵 컬처의 시대라지만 내 아이는 대하소설에 흠뻑 빠져들 수 있기를 등등.

 

그리고 이런 거창한 것도 덧붙는다.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결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일순간 분노를 터뜨리기 보다는 문제의 상류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이익을 좇기 보다는 뜻을 좇는 사람, 시류를 따르지 않을 때 생기는 불안감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돌아보면 모든 게 나로부터 비롯된다. 공놀이는 내 어린 시절 추억의 큰 부분이고 관광지보다 유적지를 선호하는 건 내 여행 취향이다. 어떤 미디어보다 책을 윗자리에 두는 내 고집이 아이와 대하소설을 나란히 두게 만들고, 소시민적 삶을 넘어서고 싶다는 아빠의 과제가 아이의 마음이 더 강건하길 바라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거의 나를 복사해 붙인 모습의 아이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아이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아이가 나보다 낫길 기대하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모습이 아이에게 권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조심하고 싶다. 내 마음을 키우고 싶지 않다. 부모의 바람을 아이가 자각하게 하고 싶지 않다. 가급적 스스로의 마음에서 피어 오른 것들로 아이의 삶이 세워지길 바란다. 가능한한 넓은 여백을 아이 스스로 채우게 해주고 싶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길 바란다.

 

다짐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한 기대는 불쑥불쑥 드러날 것이다. 마음이란 누른다고 누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적절한 길을 터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내 삶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 좋은 출구가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시간을 할애하고, 내가 나의 한계를 상대하며 성장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아이로 향하는 기대를 나에 대한 기대로 돌림으로써 내 마음은 충족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너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식이 아닐까. 나이를 먹어도 자기 몫의 삶을 놓지 않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의 눈에 아름답게 비칠 테니 말이다.

 

아이의 눈에 부모가 아름답게 비친다, 그런 생각을 하면 행복하다.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바라지 않으면서 그저 나의 삶을 상대하는 모습으로 아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다. 그 다음은 온전히 아이의 몫이고, 어쩌면 아이가 스스로의 손으로 나를 닮은 삶을 그릴지도.

 

이런, 아이에 대한 기대를 끊는 게 이렇게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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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게 라면 끓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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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물을 올리고, 냉장고 야채 칸을 뒤져요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가벼운 이야기를 해봅시다. 라면 좋아하시나요? 저는 라면광입니다. 새로운 라면이 나오면 반드시 먹어보지요. 구수하고 매콤한 국물, 땡땡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발, 계란과 파와 김치의 환상적인 조화, 게다가 5분이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편리함까지 갖추었으니 기가 막힌 음식이지요. 하지만 라면은 몸에 나쁘지 않을까요?

 

라면이 몸에 나쁘다는 사람들은 지방과 소금(나트륨) 함량이 너무 높고, 양질의 단백질과 비타민 및 섬유소가 부족하고, MSG를 비롯한 화학적 첨가제가 많이 들어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일단 MSG는 수많은 실험과 관찰 연구를 통해 무해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WHO에서도 선언했으며, 합리적으로 따져봐도 해로울 가능성이 별로 없어요. 그 정도 되면 믿어도 됩니다. 음모론 같은 걸 들고 나와 한사코 믿지 않으려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것이 오히려 해롭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라면에는 MSG가 들어있지 않아요. 하도 말들이 많으니 뺐다고 합니다. MSG를 쓰지 않고도 그렇게 오묘한 맛을 낼 수 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 참 대단하긴 합니다. 다른 화학적 첨가제도 인체에 유해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식품 첨가물은 의약품 수준으로 철저한 검증을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 할 것은 없지만, 너무 많이 섭취할 것도 없다는 정도로 정리해두면 좋겠습니다.

 

라면의 지방 함량이 높은 것은 면을 기름에 튀기기 때문입니다. 다른 식사 때 지방을 덜 먹는 방식으로 1일 섭취량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삼겹살 대신 목살을 먹는다거나, 기름이 덩어리진 부분은 잘라낸다거나 하는 거지요. 튀기지 않은 라면도 있어요. 지방 함량이 훨씬 낮고, 당연히 칼로리도 낮습니다. 일반 라면이 550 kcal 수준인데 350 kcal 정도입니다. 조금 비싸고 보존 기간이 짧은 것이 흠입니다.

 

그럼 소금 함량이 높은 것하고 비타민과 섬유소가 부족한 문제가 남네요. 저는 이렇게 합니다. 일단 물을 올리고, 냉장고 야채 칸을 뒤져요. 요리에 쓰고 남은 호박, 버섯, 양파, 감자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시 한 번 잘 씻어 적당한 크기로 썰지요. 그때쯤이면 물이 끓습니다. 라면과 스프와 야채를 넣는데, 스프는 1/2 ~ 2/3만 넣습니다. 끓는 동안 그릇에 파 한 개를 썰어 넣지요. 버섯이나 양파도 일부는 냄비에 넣어 끓여 국물 맛을 내고, 일부는 얇게 썰어 그릇에 넣고 살짝 익혀 먹습니다. 1분 남았을 때 계란을 냄비에 깨 넣고 불을 끈 후, 1분 기다렸다 라면을 그릇에 옮기고 위에 쑥갓이나 부추를 수북이 올려요. 좀 럭셔리하게 먹고 싶으면 낙지 한 마리를 통째로 넣거나, 새우, 문어, 고기를 넣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 먹으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어요. 일단 스프를 적게 넣으니 소금 함량이 줄고, 야채를 듬뿍 넣으니 섬유소를 보강할 수 있지요. 생야채를 수북이 얹어 먹으면 맛도 좋고 비타민 보충에도 그만입니다. 자칫 냉장고 안에서 상하게 될 야채를 먹어 치우면서, 칼질, 불 조절, 재료 넣는 타이밍 등 기본적인 요리법을 익히는 기회도 됩니다. 라면 자체가 기본적으로 맛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먹다 남은 갈비나 치킨, 돼지족발, 오징어나 문어도 넣어 보고, 배추나 무우, 통마늘, 아스파라거스, 방울 양배추, 시금치, 숙주나물을 넣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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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단순한 것을 먹어도 만족할 수 있다면

 

라면에 익숙해지면 간단한 요리를 만드는 법을 꼭 익혀두세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국을 끓이거나 나물을 무치는 것 정도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요. 남자든 여자든 요리를 배워두면 건강한 음식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좋고, 가사 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할 수 있으니 좋고, 세상 어디든 가서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니 좋지요. 자신이 붙으면 슈퍼나 장에도 가보세요. 식재료를 고르고, 몸에 좋은 음식이 뭔지 생각해보고, 사람들이 어떤 식품을 사고 파는지 보는 것만도 큰 공부가 됩니다. 그런 공부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지만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바라보고, 계획하고, 꾸려가는 데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경험입니다. 삶이 완전히 달라지지요. 그런 경험을 평생 해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재미있는 일을 못 해보니 불행하고, 자칫 혼자 남게 되면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하니 불쌍해집니다.

 

간식도 스스로 챙기면 좋아요. 앞에서 말했듯 과자나 음료수를 피하고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 견과류를 직접 골라보세요. 건강한 식습관을 얘기할 때 하루 5번, 서로 다른 색깔의 과일이나 야채를 먹으라고 권합니다. 어렵지 않아요. 저는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더 쉽지만 보통 하루에 사과 1-2개, 바나나 1개, 오이나 샐러리를 1번, 토마토 1개, 견과류 한 줌 정도를 먹습니다. 음료는 신선한 저지방 우유와 차, 커피를 마시고, 밖에 나갈 때는 물병에 물을 가져 가지요. 환경을 생각해서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파는 생수는 피하세요. 치즈도 조금 먹고, 양상추나 브로콜리에 저지방, 저염 드레싱을 뿌려 먹거나, 식빵을 구워 땅콩버터와 저가당 잼을 바르고 달걀과 햄을 넣어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기도 합니다. 누구나 쉽고 빠르게 장만하여 먹을 수 있는 것들이지요.

 

드레싱이나 땅콩버터, 잼 같은 건 직접 슈퍼에서 사보세요. 이때 식품 성분표를 잘 봐야 합니다. 소금이나 설탕을 아예 넣지 않았거나, 조금만 넣은 것을 고르세요. 땅콩버터는 빵에 바르기 쉽게 첨가제를 쓴 것과 그냥 땅콩만 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당연히 땅콩만 든 것이 좋겠지요. 식품첨가물을 먹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알려진 것만큼 몸에 나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단순한 것을 먹어도 만족할 수 있다면 단순한 것을 먹는 게 낫습니다. 드레싱은 칼로리를 따져보고 사는데, 입에 맞지 않으면 칼로리가 약간 높더라도 입에 맞는 것을 고르세요. 건강만 따지며 살 수는 없어요. 먹는 재미도 중요하니까요. 이런 식으로 자기 입맛에 맞는 걸 골라 나가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식품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스스로 건강을 챙기는 능력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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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 매일매일 사용하는 인테리어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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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revel

 

 

그간 무인양품에서 가장 많이 산 제품은 수건이다. 딱히 엄청나게 좋다기보다 접근성이 좋았다. 단정한 모노톤의 수건을 한 자리에서 사이즈별로 살 수 있는 매장을 딱히 찾기 쉽지 않았고, 제품 라인의 지속성 덕분에 언제든 똑같은 라인의 제품을 구매해 대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수건의 경우 스테디한 판매 여부가 상당히 중요하다. 옷걸이와 수건은 제식훈련처럼 통일된 맛이 있어야 살림이 돌아가는 공간에서도 안온함이 깃든 인테리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넓고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 매장에서 주로 수건을 사게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외출의 행복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시내에 놀러 나온 중학생 친구들이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다이소나 아트박스에서 행복한 가운데 진지하게 물건을 고르듯, 30대의 나는 번화가에 들리면 무인양품을 찾아갔다. 행복한 나들이의 정점은 대상과 지출의 크기 여부와 상관없이 뭐라도 하나 사서 돌아오는 쇼핑에 있다는 꽤나 굳은 신념을 갖고 있으며, 이를 실천하기에 수건은 지출의 합리화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꽤나 적당한 품목이었다. 수건의 권장 사용주기는 대체로 2년이지만 우리 집의 경우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수건을 교체하다보니 적재하고 살만큼의 과소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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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lton

 

 

갓 체크인한 호텔처럼 아늑하고 살림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은 정돈된 살림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관리가 잘된 질 좋은 수건은 성실함과 직결되는 문제다. 살림살이에 잠식된 삶과 가꾸며 살아가는 삶 사이의 가장 치열한 전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의외로 매일 접하는 것,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에 소홀한 경향이 있다. 비싼 돈을 들여 리모델링을 하고 세련된 가구를 들여놓고, 이런저런 소품으로 꾸민 식탁 의자 위에 알지도 모르는 이의 몇 년 전 결혼기념 수건이 널려 있는 이유다.

 

수건은 몸에 닿는 제품인 만큼 최소 30수 이상으로 만든 오가닉 제품을 고르길 권장하고, 바스타월, 페이스타월, 핸드타월을 용도별로 구비해 활용하길 추천한다. 우리 집의 경우 핸드타월을 세면대 옆에 배치해 물기를 제거하거나 면도할 때 쓰고, 샤워를 할 때는 바스타월로 물기를 제거한다. 페이스타월로 온몸을 닦는 것보다 흡수력 면에서 뛰어나 세탁의 텀을 늘일 수 있다.

 

여유가 된다면 아예 조선호텔의 수건을 구매하는 방법도 있지만, 앤데이지홈이나 타월가게봄과 같은 고사양의 제품으로 자체 제작하는 몰의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무인양품도 역시나 좋은 옵션이다. 새로 들이는 것만큼 거절하고 헤어지는 방법도 중요하다. 판촉용 타월은 가능한 받아오지 말고, 낡아서 거칠어지고 색이 바랜 타월은 과감하게 버리는 습관을 들여야 정돈된 살림의 톤을 지킬 수 있다. 참고로 수건은 가연성 쓰레기임으로 종량제봉투에 버리면 된다. 괜히 헌옷 수거하는 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

 

수건은 구매보다 관리가 중요한 품목이다. 호텔이 비싼 이유는 수건과 침구 때문이라 생각한다. 여간 관리가 귀찮고 까다로운 게 아니다. 우선 쓰던 수건을 욕실에 두는 건 보기에도 안 좋고 위험하다. 습기는 수건 냄새의 주범인 곰팡이와 박테리아를 철썩 같이 끌어당기는 영매라 여기자. 마찬가지 이유로 다 쓴 수건을 바닥에 던져놓거나 빨래통에 곧장 던져 넣는 것도 안 되고, 아침에 머리 말린 수건을 대충 의자에 걸쳐 놓고 나가서도 안 된다. 베란다 같은 곳에 사용 중이거나 사용한 수건을 널어놓을 수 있는 작은 건조대를 마련하자. 그래서 사용 후에나 빨래를 하기 전에도 반드시 널어놓자. 참고로 호텔에 투숙할 때 다 쓴 수건을 바닥에 던져놓고 가는 것도 지양해야 하는 에티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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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Ritz-Carlton Shops

 

 

빨래는 성미에 안 차겠지만 조금씩 자주 해야 한다. 바스타월은 2~3장, 페이스타월은 5장 내외로 울 세탁코스로 단독 세탁한다.(수건용 건조대가 따로 필요한 이유다) 온수의 온도는 40도 이하로 지켜주고, 세제는 권장량 혹은 옷 빨 때 쓰던 양의 2/3 수준으로 줄인다. 섬유유연제는 수건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니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 냄새가 날 경우, 식초를 한 컵 같이 넣거나, 과탄산소다를 희석한 물에 2시간 이상 담가 놓거나, 헹굴 때 소금을 추가하거나, 베이킹소다와 구연산 콤비를 활용하는 등 많은 살림의 지혜와 대증요법이 있지만 내 경우 새로 산다.

 

수건 냄새의 원인은 곰팡이, 박테리아다. 이 두 원흉에게는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게 가장 처절한 응징이긴 하나 이는 폐허 위에 쌓은 승리일 뿐이다. 테리 면 조직은 뜨거운 온도에 가장 취약하다. 두툼하고 뽀송한 피부와 수분 흡수 기능을 상실하는 지름길이다. 따라서 삶거나 직광에서의 햇볕 소독은 뽀송뽀송한 수건의 감촉을 즐기고 싶다면 지양해야 한다.

 

수건의 활기는 건조 과정에서 좌우된다. 공기를 머금은 뽀송한 수건을 쓰고 싶다면 통풍이 잘 되는 건조하고 밝은 실내 공간(직광이 아닌)에서 바싹 말려야 한다. 포인트는 널기 전에 10회 이상 털어주는 거다. 이는 원사가 한 올 한 올 고리 모양을 하고 있는 테리 직물의 특성 때문인데, 빨래를 하고 나면 이 고리들이 뭉치고 엉키기 마련이라 풀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10회 이상(마음 같아서는 20회 이상) 털어서 말리면 이 엉킨 올들이 풀리면서 두툼하고 뽀송뽀송한 호텔 수건처럼 되살아난다. 물론, 건조기가 있다면 이 수고로움은 생략해도 좋다. 건조기가 생활가전인 이유다. 수건을 보관할 때는 가로로 겹쳐놓는 것보다 책꽂이에 책을 꽂듯 세로로 쌓아놓는 것이 낫다. 눌림이 적어 공기층 확보가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수건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건 습기가 눌러앉은 탓이다.

 

공간이 주는 안온함은 사실 인테리어가 아니라 생활 습관 속에서 피어난다.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멋진 공간보다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부드러운 테리면의 촉감을 눈으로 즐기는 데서 일상에 대한 애정과 열정과 위로가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린 집에 들어서면서 스트레스를 감압하고, 방전된 심신을 충전한다. 집을 가꾸고 꾸미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공간에 애정을 쏟을수록 효율이 높아진다. 신선한 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감촉의 뽀송한 수건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해보길 권한다. 아마도 세안을 하거나 샤워를 한 다음 수납장에서 수건을 꺼낼 때, 그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여유가 삶에 깃들 것이다. 비록 수건을 바닐라색 플라스틱 장에서 꺼낸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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