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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숙증은 정말 심각한 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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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이 글은 여자아이들의 성조숙증에 관한 글입니다. 남자아이들의 성조숙증은 늘고 있지 않으며, 항상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사춘기는 유방 발달 -> 키의 급속한 성장 -> 초경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보통 10세 경에 가슴이 나오고(사춘기 시작), 11세 경부터 키가 부쩍 커지며, 12.5-13세에 초경이 시작되면서 급속성장이 끝납니다. 성조숙증 여부는 유방을 보고 판단하는데, 만 8세 이전에 유방이 발달하면 성조숙증이라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성조숙증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집니다. 언론은 쇼킹한 걸 좋아하죠. 성조숙증 기사에는 으레 환경호르몬이나 고기에 포함된 성장촉진용 호르몬 얘기가 따라붙습니다. 이런 보도는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일단 성조숙증이 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환경호르몬과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화를 냅니다. 그렇게 당연한 걸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식품회사나 화학회사 등 거대자본의 음모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과학입니다. 과학에서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과학은 뭐든 의심하고, 연구합니다.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증거가 없으면 그냥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동물이기 때문에 ‘증거 없음’으로 설득시키기란 여간 어렵지 않지요. 나중에 증거가 발견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왜 성조숙증이 늘어날까요? 많은 의사들이 비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비만해지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만해진다는 건 지방세포가 커지거나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사춘기란 생물학적으로 자손을 남길 준비를 갖추는 시기라고 했지요? 여성이 아기를 잉태하여 10개월간 무사히 키우려면 영양상태가 좋고 건강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말입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형성되던 먼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을 겁니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어느 정도 영양상태가 좋은 여성만 아기를 갖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영양상태를 뭘로 알 수 있을까요? 지방이 어느 정도 이상 몸에 축적된다면 영양상태가 좋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성은 몸속에 지방이 늘어나면 사춘기가 시작되어 아기를 갖도록 진화한 거지요. 구체적으로 지방세포에서는 렙틴(leptin)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여성에서는 렙틴이 사춘기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하며, 렙틴이 부족하면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재미있는 건 남성의 사춘기는 렙틴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비만한 남자아이는 사춘기가 늦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자는 살이 찔 겨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와야 쓸모가 있고, 후손을 이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까요? 이런 사실은 현재의 남녀평등사상과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진화해 왔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성조숙증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춘기가 빨리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사춘기의 문제는 뭔가요? 한마디로 충동은 늘어나는데 그 충동을 조절할 능력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겁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잖아요. 신체적 능력은 최고조에 달해 자신감이 넘치는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은 부족하지요. 또한 현대는 청소년에게 늦게 성숙하기를 강요하면서, 가족과 공동체가 약화되어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역량은 부족한 시대입니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고 정보가 범람하면서 유혹은 그야말로 모든 곳이 존재합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 일탈이나 비행이 자주 일어나고, 정신질환도 일생 중 어떤 시기보다 많이 생깁니다.

 

다른 나라와 우리를 비교하기는 싫지만 서양에서는 자녀에게 성조숙증이 생기면 부모들이 이런 쪽에 더 신경을 씁니다. 충격을 받거나 우울증이 생기는 등 정서적인 어려움은 없는지, 친구들과 변함 없이 잘 어울리는지, 가족과 소원해지지는 않는지가 일차적인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키에만 신경을 씁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쁘면 물론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옛날 어른들은 눈의 착각을 경계하는 말을 많이 하셨지요. “키 큰 녀석은 싱겁다”든지,, “너무 예쁘면 얼굴값을 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성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은 그런 말 대신 “키나 용모도 경쟁력”이라든지, “나중에 취업이나 결혼을 할 때까지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자녀에게 할 말인가요?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요? 나부터 그렇게 말하고 믿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된 건 아닐까요?

 

성조숙증이 있으면 키가 안 크고, 그러면 아이의 앞길을 망친다는 부모의 마음은 절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속기 쉬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절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평생 과학이나 의학에 몸담은 사람도 불치병에 걸리면 검증되지 않은 치료에 매달리거나, 심지어 귀신을 쫓는다고 굿을 하기도 합니다. 진짜 귀신이 누군지 아세요? 돈 냄새를 맡는 사람들입니다. 귀신같이 그 틈을 파고들지요. 포털에서 ‘성조숙증’으로 검색해보세요. 상업광고가 넘쳐납니다. 그 아래 뉴스도 있지요. 가만히 보세요. 특정 업체가 반복적으로 ‘뉴스’에 나옵니다. 돈 주고 기사를 산 겁니다. 요즘은 아주 허튼 소리를 하면 장사가 안 돼요. 어디서 주워 들은 말은 있어서 초경을 늦춰준다고 광고를 합니다. 정밀검사를 하라고 부추깁니다. 정말 정밀검사와 치료가 필요할까요?

 

『우리 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란 책이 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아내분비 교수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1) 성조숙증으로 병원을 찾는 아이 중에 진짜 성조숙증은 상당히 드물다. 진짜 성조숙증이라고 해도 정밀 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더욱 드물고,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2) 진짜 성조숙증인 아이들도 대부분 치료받지 않아도 정상 신장(키)에 도달한다. 헉! 정말인가요? 예, 정말입니다.

 

진짜 성조숙증이 뭔지 설명하자면 얘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 일단 넘어갑시다. 정 궁금하시면 책을 참고하세요. 성조숙증인데도 대부분 정상 신장에 도달하는 이유는 진단 시에 이미 키가 평균보다 크고, 사춘기 급속성장 기간이 더 길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주 키가 작아져 사회생활에 지장을 겪을 위험이 있다면 치료해야 합니다.

 

즉, 1) 6세 이전에 사춘기가 시작된 경우 2) 6세 이후에 시작되었더라도 급속히 진행하는 경우 3) 처음 진료실을 찾았을 때 신장이 평균 이하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급속히 진행하는지 어떻게 알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정기적으로 관찰하는 겁니다. 처음 진료 시 급속히 진행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4-6개월 뒤에 다시 진료실을 방문하여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성격이 급해서 대부분 몇 개월씩 기다리지 못합니다. 진료실을 나가는 순간 온갖 상업광고와 공포마케팅이 밀려듭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가면 바로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6개월을 어떻게 기다려요? 그러다 아이 난장이 되는 꼴 보시려구요?”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아, 역시 여기 찾아오길 잘 했어!’ 그리고 ‘정밀검사’를 받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값비싼 약과 키를 키워준다는 건강식품을 한아름 사서 집으로 갑니다. 누구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뭔가를 파는 사람 말이 맞을까요, 아무 것도 팔지 않고 안심하라고 일러주는 사람 말이 맞을까요?

 

성조숙증은 ‘조기에 잡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질병이 아닙니다. 4-6개월 정도 기다려 진행 속도를 정확히 평가한 후 치료를 결정해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래도 키가 걱정된다고요? 어린 나이에 매달 주사를 맞고 검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환자’라는 인식을 갖는 아이의 마음은 생각해보셨나요? 이 아이들이 은연 중에 ‘키 작은 녀석은 루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세상이 각박해지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 탓을 하지만 세상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줄리아 로스먼 저/김선아 역 | 더숲
성조숙증이 생겼을 때 아이는 신체적 문제와 함께 어떤 심리적, 행동적 문제를 겪는지, 병원을 찾는 경우 어떤 검사와 치료를 받게 되며 의사에게는 무엇을 물어 보고 아이는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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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칠 때까지 먹어야 제대로 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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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올리는 스페인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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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참! 갈리시아 Galicia 지역의 요리 ‘뿔뽀(Pulpo, 문어)’도 빠질 수 없죠.

 

스페인을 대표하는 요리는 무엇일까요? 넓적한 팬에 쌀과 해산물 혹은 고기를 넣고 끓이는 빠에야 Paella? 도토리를 먹고 자란 흑돼지의 뒷다리를 염장한 하몽 Jamon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테죠. 스페인에 다녀갔다면 감자튀김 위에 매콤한 소스를 뿌려 먹는 빠따따 브라바스 Patatas bravas나 생새우를 마늘과 함께 올리브유로 익혀 먹는 감바스 알 아히요 Gambas al ajillo의 맛과 향이 먼저 떠오를까요?

 

여름에 세비야를 비롯해 남부 스페인에 머물렀다면 토마토 수프를 차갑게 해서 마시는 가스파초 Gazpacho 나 살모레호 Salmorejo의 시원한 맛이 생각나는 분도 있을 거예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먹는 음식이라면 돈키호테의 고장, 라만차 요리 삐스또 Pisto를 빼놓으면 안 되죠. 음식 타령을 늘어놓고 있자면 어떤 분은 ‘무슨 소리야. 그런 음식은 여행자들이나 먹는 거고 진짜 스페인을 봤다면 숯불에 구운 아사도 Asado 야’ 하거나 ‘우리가 된장찌개 먹듯이 이들도 흔히 먹지만 각자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토르티야 Tortilla가 진짜 스페인 음식이지’ 하는 분도 계시겠네요.

 

그래도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많이 마주하는 음식은 아마도 ‘바르’에서 먹는 타파스가 아닐까 해요. 참, 바 Bar를 스페인어로 읽으면 바르가 돼요. 표기법은 같으나 영어와 스페인어의 발음 사이에서 생기는 차이지요. 스페인 어디에서나 바르를 찾을 수 있어요. 골목을 걷다 보면 ‘이렇게 외져서 장사가 되나?’ 싶은 곳에도 있는데요. 스페인이란 나라는 수호성인 산티아고(야고보)가 지키고 수많은 골목은 바르가 지키는 것이 아닌가 싶어지는 풍경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바르가 없으면 못 사는 것처럼 보여요. 아침에 눈을 떠 커피와 보카디요로 아침 식사를 하는 곳도 바르이고, 수다 상대를 찾기 위해서도 바르에 가요. 주말에는 꽤 근사한 식사를 내놓는 레스토랑으로 변신하니 친구들과 주말 약속 장소도 여지없이 바르죠. 그야말로 스페인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바르에서 지내지요. 골목마다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바르가 있게 된 것인지, 바르가 많아서 스페인 사람들 인생에 한 부분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어요.

 

그 여자와 저는 여행에서 현지인들의 문화를 따르려고 노력합니다. 아침에 빵집에 가서 방금 구워낸 바게트 하나 고르고 까페 솔로(에스프레소)와 보카디요(스페인식 샌드위치)로 아침 식사를 하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추로스 가게에 들려 코코아 한 잔에 츄로스 한 접시로 디저트를 대신하기도 해요. 도시를 거닐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추천받은 식당에서 메뉴 델 디아를 맛보기도 합니다. 간식으로 아침에 산 빵을 반으로 쭉 갈라 하몽 또는 치즈를 담뿍 올리면 이만한 간식이 없어요. 시장에 찾아가 절인 올리브 중 아삭한 녀석을 한주먹 사서 김치 마냥 곁들이기도 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면 바르(Bar의 스페인어 발음)에 들어가 세르베싸(맥주의 스페인어 발음) 한 잔으로 하루를 마칠 차비를 하지요. 동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식당 한 켠에 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처음에는 쭈뼛쭈뼛했지만 익숙해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더라고요.


전문가가 추천하는 미식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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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보고만 있어도 군침이 돌죠?

 

화장실도 이용할 겸 바르에 들리면 어김없이 바 위에 올려져 있는 음식이 바로 타파스예요. 타파스는 스페인 남부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하기보단) 음식인데요. 그 기원이 참 다양해요.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남미에서 넘어온 갖가지 재료로 요리된 음식을 한 입씩 맛보려고 조금씩 덜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잔 속으로 들어가는 파리를 막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라는 설도 있어요. 안달루시아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파리가 정말 많거든요. 길을 걷는 중에도 파리가 한꺼번에 열 마리씩 몸에 달라붙는 정도니까요. 파리 때문에 빵 위에 조리된 음식을 조금씩 올려놓고 뚜껑을 덮었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남부에서 빵 위에 올려놓고 먹는 타파스를 스페인 북쪽에서는 핀쵸스 Pinchos라고 불러요. 핀쵸 Pincho는 번역하자면 ‘꼬챙이’ 혹은 ‘꼬치구이’ 쯤이 되는데요. 말 그대로 이쑤시개로 꿰어 올려둔 음식들을 핀쵸스라고 부르지요. 꼬챙이가 없이 빵 조각 위에 올린 타파스도 북쪽에서는 핀쵸라고 해요. 타파스든 핀쵸든 여행자에게는 이것저것 많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반가운 방법이죠. 바에 살짝 기대어 서서 한두 개 맛보고 동네를 둘러보다가 또 배가 고파지면 다른 바르에 들어가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간단한 음식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곳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Basque 지역의 산 세바스티안 San Sebastian입니다. 얼마 전 영국의 한 케이터링 업체가 재미있는 조사를 했는데요. 전문가 의견, 인구당 레스토랑 수, 패스트푸드점 비율, 레스토랑의 다양성, 파인 다이닝, 스트리트 푸드 등 총 15개 항목으로 평가해 여행자가 방문해야 할 전 세계 미식 도시 100곳을 선정한 거죠. 그렇게 해서 뽑힌 '2017/2018 최고의 미식 여행지(2017/2018 Best Food Destinations)' 1위에 오른 도시가 바로 스페인 산 세바스티안입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타이어 회사인 미슐렝(Michelin, 미쉐린)이 타이어 닳도록 여행 많이 다니라고 맛집 가이드북을 만든 것이 ‘미슐렝 가이드’인데요. 맛으로의 음식을 넘어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요리를 손님에게 내놓는 가게 만이 그 가이드북의 별을 받을 수 있다죠. 구심지에 위치한 핀쵸바 거리에 가면 그 받기 힘들다는 미슐렝의 별을 단 식당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어요. 간단히 먹고 돌아설 수 있는 음식이라 여겼던 핀쵸를 이용해 분자요리의 성지가 된 곳이 바로 산 세바스티안입니다. 물론 별을 받은 식당은 예약 없이 들어가기 힘들지만 구심지 안의 핀쵸바들 중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도 많아요. 물론 그들이 내놓는 요리도 훌륭합니다. 맛은 물론이고, 눈도 즐거운 요리를 만날 수 있지요.

 

‘먹고 또 먹고 지칠 때까지 먹어야 제대로 된 스페인 여행이 아니겠냐’고 자문해 보지만 이렇게 먹다 보니 스페인에 와서 축 쳐진 제 뱃살에게 미안해지는 건 어찌할 수 없네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당신은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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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성수역으로 가는 2호선 지하철 안엔 술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최지연 씨는 출입문 옆에 기대어 섰다. 연 이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었기에 다리가 뻐근했다. 건너편 좌석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그녀가 앉기에 좌석 공간은 좁아 보였고 양쪽엔 모두 남자들이었다. 몸에 배인 습관이었다. 오래전 만원 지하철 좌석에서 옆 자리의 젊은 남자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본 적이 있다. 옆에 앉은 여자 때문에 숨을 못 쉬겠다느니 대중 교통에도 몸무게 제한을 둬야 한다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남자 옆 빈자리엔 앉지 않았다.

 

최지연 씨에게 출퇴근을 위해 지하철을 타는 30분 가량은 힘겨운 시간이었다. 문이 열리고 새로운 승객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고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채팅 창에 그녀를 흉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시선을 책에 고정하는 것으로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곤 했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출입문 창에 비친 커플의 모습이 보였다.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은 그녀를 쳐다보며 속닥이고 있었다. 최지연 씨는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남자가 여자의 팔뚝과 옆구리를 만지며 손가락으로 두툼한 살집 모양을 만들자 여자가 킥킥거리며 남자의 어깨를 밀쳤다. 최지연 씨는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집까지는 두 정거장이 남아 있었지만 출입문이 열리자 그녀는 바로 열차에서 내렸다.

 

생각해보면 흔한 일이었다.

 

대학 친구들과 처음 워터파크에 갔을 때 조소를 머금고 그녀의 몸을 곁눈질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뒤로는 수영장에 가지 않았다. 목욕탕이나 찜질방도 마찬가지였다. 마트에서 음식을 한꺼번에 사야할 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녀의 체중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어려서 살찌면 귀여운 거지만 나이 들어 살찌면 가여운 거라는 상사의 핀잔 정도는 약과였다. 같은 커피라도 날씬한 사람이 타주는 게 더 맛있더라, 요즘 옷은 사이즈가 작게 나오던데 이런 프리 사이즈는 어디에서 사는 거냐, 순수하게 건강 걱정해서 이야기하는 건데 다이어트 좀 해야겠다…. 마치 뚱뚱한 여자의 체중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언제든 내뱉아도 괜찮다는 프리 쿠폰이라도 가진 것 같았다.

 

명절에 집에 가면 친척들로부터 살 빼라는 잔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야 했다. 적게 먹으면 그 덩치에 그거 먹어서 되겠냐고 했고, 많이 먹으면 그러니까 살찐다고 했다. 지난 설에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을 차리면서 상과 상의 간격을 좀 떨어뜨려야 가족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겠다고 하자 고모가 한마디 던졌다.

 

“살 좀 빼면 다들 그냥 앉을 수 있겠네.”

 

여느 때라면 그냥 듣고 넘겼을 텐데 순간 울컥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아 숟가락을 밥상 위에 던지고 일어나 방을 나가는 그녀 뒤통수에 대고 고모가 소리를 질렀다.

 

“저거 봐. 뚱뚱한 게 성격까지 지랄 맞으면 진짜 시집은 어떻게 갈래!”

 

최지연 씨의 체중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 생활을 할 때였다. 집과 학원을 오가는 일 년 간 10킬로그램이 늘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오르락내리락하던 체중은 야근이 잦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늘어 현재는 70킬로그램을 넘은 상태였다.

 

다이어트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아니, 해보지 않은 다이어트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홈쇼핑에서 파는 다이어트 보조제들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하루 한 끼를 먹거나 원 푸드 다이어트를 해보기도 했지만 오래 지속하긴 어려웠다.

 

체중을 가장 많이 줄였던 것은 여름 휴가 동안 단식원에 갔을 때였다. 일주일간 효소와 구운 소금만 먹고 6킬로가 빠졌지만 이후 빠진 체중은 금세 제자리를 찾았고, 한 달이 지났을 땐 그곳에 가기 전보다 3킬로가 늘어 있었다. 최지연 씨는 억울했다. 따로 운동을 하진 못했지만 평소 식사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이어트 때문에 밥은 반 공기만 먹는데도 왜 체중은 늘어만 가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열한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이지만 집에서 멀지는 않은 곳이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지나쳤던 것 같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 광고판이 눈부셨다.

 

“이제 마음껏 먹으면서 빼자!
30일 간의 마법 같은 변화를 느껴보세요!”

 

광고판 속 모델은 쭉 뻗은 다리를 벌리고 선 당당한 포즈로 자신을 따라해보라는 듯 이야기했다. 최지연 씨는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난 죽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야.”

 

그녀가 눈길을 돌렸을 때 불 꺼진 건물 3층에 환하게 빛나는 창이 보였다. 한참 멍하니 불빛을 쳐다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건물 쪽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

 

“식사 일기는 써 보셨나요?”

 

일주일만의 두 번째 방문이었다. 지난 주 살 빼는 약을 처방해달라고 하는 최지연 씨의 요청에 의사는 약과 더불어 일기 쓰기를 처방하며 이렇게 당부했었다.

 

“우선 적기만 하세요. 다른 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물을 포함해 입으로 들어가는 건 모두 기록해야 해요.”

 

먹는 것을 기록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혼자서 밥을 먹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괜한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기록하지 못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하루 동안 먹었던 것을 생각하다 보면 빠뜨린 걸 발견하곤 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 음식을 먹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음식 사진을 찍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매일 저녁 침대에 누워 그날 찍은 사진을 다시 보며 누락된 음식 목록을 채웠다.

 

미간을 찌푸린 채 식사 일기를 들여다보던 의사가 이야기했다.

 

“아침은 거의 안 드시는 것 같네요.”

 

“네, 아침엔 입맛도 없고 먹을 시간도 없고… 대신 오전 중에 간단한 간식 위주로 먹는 편이에요.”


“간단해 보이는 간식이라 해도 칼로리가 적지 않아요. 특히 여기 적힌 도넛이나 샌드위치 같은 음식들은. 아, 초콜릿도 자주 보이는군요. 이 정도만 해도 한 끼 열량은 훌쩍 넘습니다. 이외 시간에 먹는 간식들까지 합하면 세 끼 식사를 끊어도 되겠어요. 이런 상태에서 밥을 반 공기 남겼다고 하여 적게 먹었다 생각하는 건 착각입니다.”

 

순간 최지연 씨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침은 꼭 드세요. 공복 시간이 길어 허기를 느끼면 쉽게 열량을 채울 수 있는 음식을 찾거나 폭식을 하게 됩니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배가 고프기 전에 먹는 게 좋아요. 그리고 하루 세 끼 외에 간식은 끊으세요. 음료는 물과 아메리카노 커피만. 앞으로도 식사 일기는 계속 쓰셔야 합니다.”

 

단호한 말투에 그녀는 주눅이 들어 보였다. 의사는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약 드시고 불편한 건 없었나요?”

 

“말씀해주신 대로 입이 마르고 조금 어지러울 때가 있긴 했는데 많이 불편하진 않았어요.”

 

“잘됐네요. 일단 3개월 정도까지 드시도록 할거에요. 이후엔 반응을 봐서 좀 더 처방할 수도 있구요. 효과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식단 관리가 안되면 약으로 뺀 살은 다시 찐다는 걸 명심하셔야 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주에 처음 오셨을 때 체중이 73킬로그램이었죠. 최지연 씨가 바라는 체중은 어느 정도에요?”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녀는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말했다.

 

“50킬로그램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늘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체중계에서 5로 시작하는 숫자는 본 적이 없지만요.”

 

“키가 162센티미터인데 50킬로는 저체중에 가깝습니다. 일단 60킬로 대로 줄이는 걸 일차 목표로 하지요. 다음 주 목요일 퇴근 길에 들르세요. 다음번엔 운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상의해봅시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보며 망설이는 듯하던 의사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최지연 씨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신경 쓰지 말아요.”

 

예상치 못한 의사의 말에 그녀는 울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일주일 전 여기 왔을 때,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어요. 그날 기분이 최악이었거든요. 그런데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이 병원 창문이 보였죠. 시커먼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는 병원 창문을 보고 달이 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불빛이 제게 구원의 손짓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의사는 다시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좀 우습게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그냥 선생님께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그녀 위로 진료실 천장의 형광등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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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선생님, 저는 많이 먹진 않아요.”

 

비만 치료를 할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 하나다. 체중 감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섭취하는 열량을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먼저 자신이 어떤 음식을 얼마나 먹고 있는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비만 치료에서 식사 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비만 환자들은 자신이 먹는 열량을 과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식사 일기를 쓰는 것이 스스로의 식사 패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인 열 명 중 세 명이 비만 환자이며, 비만을 해결하려는 국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십여 년째 비만율에는 큰 변화가 없다. 비만 합병증으로 인한 직접적인 질병 부담도 큰 문제이지만, 비만 환자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편견 역시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게으르고 자기관리를 안 해서 살이 찐다는 시각이 그 예다, 비만 환자는 합병증의 위험과 사회적 낙인의 이중고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날씬함이 곧 건강함의 지표인 양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러한 부정적인 낙인을 강화시키며, 날씬함의 기준이 엄격해질수록 낙인으로 인한 부작용은 심해진다.

 

최근 영국에선 유명 모델을 앞세운 모 다이어트 제품 광고가 “당신은 카다시안을 따라잡을 수 있나요(Can you keep up with a Kardashian)?”란 카피를 사용하여 여성에게 비현실적인 몸매를 강요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한국에서도 젊은 여성의 체형에 대한 인식 왜곡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며 전문가들은 마른 체형을 이상화하는 미디어의 영향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한다. 국내 연구* 결과 정상 체중 여성의 약 40퍼센트가 자신이 뚱뚱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올바른 체형 인식을 가진 여성에 비해 잘못된 체형 인식을 가진 여성에게 금식이나 폭식 등의 무리한 체중 조절 경험이 많았으며,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위험도 역시 약 1.8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한국 성인 여성 평균 키에 해당하는 162센티미터인 경우, 49~60kg 정도가 의학적인 정상 체중에 해당한다.

 

* Lee KM, Seo MS, Shim JY, Lee YJ, Body weight status misperception and its association with weight control behaviours, depressive mood and psychological distress in nulliparous normal-weight young women, Ann Hum Biol, 2015; 42(6): 528~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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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안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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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1.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의 탓인가요?


2. A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몇 가지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어느 날 B란 사람이 나타나 A의 부족한 부분을 맹비난합니다. 그러더니 옳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말을 하면서 A가 틀렸으니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B의 말은 옳은가요?

 

1번은 쉽죠? 그렇지 않습니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죠. ‘나만 잘해도 소용없다. 갑자기 들이받는 걸 무슨 수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올바로 살아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삶이에요. 부처님은 생로병사를 말씀하셨지요. 공교롭게도 모두 의료와 관련이 있네요.

 

2번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수준 미달 정치인들이 선거 때 흔히 저런 짓을 하죠. 상대방을 비난하면 자기가 높아진다고 믿고 흠집내기에 열중합니다. 정작 공약이라고 내놓은 것을 보면 허황하기 짝이 없는 데도 말이죠. A의 부족한 점을 비난하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과B가 옳으냐는 문제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A가 옳든 그르든, B는 자기 말을 입증해야 합니다.


왜 뜬금없이 철학적인 얘기를 늘어놓는 걸까요? 저는 <안아키: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사태 이후 사이비 의학책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대부분의 책에서 동일한 논리를 동원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논리를 알면 사이비를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최근 『환자혁명』이란 책이 인기입니다. 건강 서적 1위를 휩쓸고 있지요. 인터넷과 유튜브를 통해 입소문을 타더니, 카페가 결성되어 회원 수가 2만 명에 육박합니다. 기시감이 듭니다. <안아키> 때 딱 이랬지요. 그래서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질이 낮은 책이었습니다. 이런 책을 몇몇 언론에서 대서특필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또다시 <안아키>같은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책을 비판하고 올바른 정보를 알려야 할 의무감이 들었습니다.『환자혁명』 의 논리도 <안아키>와 다르지 않습니다. 영양을 잘 챙기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잠을 잘 자면 병에 걸릴 일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반적인 건강론이라면 나쁠 것 없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렇게만 하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비약하는 데 있습니다. 당뇨, 고혈압, 심장병도 낫고, 우울증이나 암까지 낫는다는 겁니다.

 

정말인가요? 평소에 영양, 스트레스, 수면 관리를 잘 했다면 병에 걸리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이 뚜렷해서 잘 관리하면 막을 수 있는 병도 있지만, 모든 것을 잘 관리해도 찾아오는 병도 있습니다. 병이 뭔지 아는 사람은 저렇게 얘기하지 않아요. 그런데 ‘영양, 스트레스, 수면 관리를 잘 했다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조금 바꾸면 결국 ‘병에 걸리는 건 모두 내 탓’이란 소리가 됩니다. 그렇게 주장하면 인기가 없겠지요? 그러니 2번 전략을 동원합니다. 제약회사와 의사와 현대의학과 정부와 기업이 짜고 약을 팔아먹기 위해 진실을 감춘다는 겁니다. 현대의학에 한바탕 맹비난을 퍼부은 다음, 바로 ‘그러니 내가 옳다’로 비약합니다. 가만히 보시면 사이비 의학책들이 다 이런 논리로 흘러 갑니다.

 

그런데요. 영양을 잘 챙기고, 운동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잠을 잘 자면 건강에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정말 의사들은 그런 것들을 ‘비밀’로 감추고 약만 지어 주나요? 예를 들어볼게요. 『환자혁명』 은 고혈압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으로 ‘몸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약을 쓰지 말라는 거지요.

 

이 말이 옳을까요? 나이가 들면 혈압이 올라가는 건 맞습니다. 건강한 음식만 먹고,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대부분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 혈압을 떨어뜨려주면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물론 약을 안 쓰고 떨어뜨리면 더 좋지요. 하지만 건강한 음식만 먹고, 잠을 잘 자는 게 항상 맘 먹은 대로 되지는 않잖아요.

 

육아 칼럼이니 육아 얘기를 해보지요. 일단 백신 이야기가 나오네요. 이 칼럼에서 여러 번 다루었지만 현재 백신이 특별한 위험을 일으킨다는 증거는 없고, 질병을 확실히 예방한다는 증거는 넘칩니다. 백신이 자폐증을 일으킨다는 괴담은 참 끈질기기도 합니다. 처음 괴담을 퍼뜨린 사람이 백신 회사를 고소하려는 변호사들과 짜고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영국에서 의사 면허가 취소되었는데도, 엉뚱한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 확대 재생산됩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괴담이 자폐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는 겁니다.

 

근 20년간 자폐증의 역사를 추적한 미국의 기자 스티브 실버만은 저서 『Neurotrib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간 단체에서 후원하는 대부분의 연구가 잠재적 원인과 위험인자를 밝히려는 끝없는 탐색에 집중된 나머지 자폐증을 겪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계획들은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다.”

 

저자는 어린이 면역 질환과 아토피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 원인으로 드는 것이 제초제와 화학물질, 가공식품, 식품첨가물, 대기오염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좋을 리 없지요. 하지만 성조숙증에서 얘기했듯이 아토피나 면역 질환을 일으킨다는 증거는 확실치 않습니다. 확실치 않은 걸 확실한 것처럼 얘기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보세요.

 

모유 수유? 이건 소아과 의사들이 입에 달고 사는 얘기고요. 오히려 모유수유가 불가능한 여성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대두되는 형편입니다. 제왕절개? 안 하면 좋죠. 어쩔 수 없는 경우는 어쩌야 할까요? 이 양반이 툭하면 들먹이는 게 장내 세균총입니다(자기 클리닉에서 유산균을 팔더군요.) 장내세균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과학자 롭 나이트는 저서 『내 몸 속의 우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프로바이오틱스의 한 가지 문제는 효과가…과장되어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러한 미생물 중 어떤 것도 사람에게 확실히 도움이 된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안아키>에서 활동하던 부모들이 다시 카페를 결성했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현대의학의 무능과 부패가 싫어서 대안을 추구했을 뿐인데 억울하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현대의학이라기보다 의사들이 문제란 건데, 그 심정 십분 이해합니다. 무능하고 권위적인 의사들을 두둔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악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해를 끼치지 말라.”『환자혁명』에도 좋은 얘기가 많습니다. (뻔한 얘기들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이 책을 믿고 당뇨나 고혈압이나 암 치료를 중단했다가 상태가 나빠지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의학에서는 백 마디 좋은 말을 늘어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마디 허튼 말로 환자가 건강과 목숨을 잃는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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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검색창에 쳐 봐도 안 나오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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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여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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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어디 가려고 열차를 기다리니?

 

 

브라질에서 볼리비아로 황열병을 실어 날랐던 일명 ‘죽음의 열차The 'Death Train', Bolivia’가 마을을 지나가지만, 내리는 사람을 찾기 힘든 간이역일 뿐이다. 딱 하나 있는 상점은 주인장이 가까운 도시에 직접 나가서 물건을 사 와야 재고를 채울 수 있는지 진열대에는 상품 대신 먼지만 가득하다. 음식을 사 먹는 사람이 없는지 식당도 하나뿐이다. 그나마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해 냉장고를 들일 수 없는 동네라 닭고기가 들어간 요리를 주문하면 마당에서 모이를 먹던 닭을 잡아내어 준다. 사람 대신 돼지와 당나귀가 큰길을 채우고 있는 이런 이상한 마을에 갔던 것은 하필 누군가가 슬쩍 건넸던 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았어.”

 

볼리비아 전역을 여행 중이던 이가 환상 속에나 존재할 것 같은 마을을 소개해 줬다. 하지만 인터넷을 뒤져도 자세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론리플래닛에 쓰인 한 줄 소개와 볼리비아 동쪽에 위치한다는 마을 이름만 손에 쥔 채 길을 나섰다.

 

남미 여행자들에게 ‘아구아스 깔리안떼스에 다녀왔다’고 말하면 마추픽추로 향하는 길에 자신도 다녀왔다고 말을 거든다. 하지만 우리가 다녀온 곳은 볼리비아 동쪽 끝에 위치한 지도에서도 찾기 힘든 동명의 마을이다. 스페인어로 ‘물’을 뜻하는 아구아와 ‘뜨거운’이란 의미의 깔리안떼가 합쳐진 지명을 발견한다면 그곳은 온천이 샘솟는 마을일 것이다. 우리가 찾아갔던 아구아스 깔리안떼스Aguas Calientes, Robor?, Bolivia도 온천수가 강바닥에서 솟아오르고 그 물이 모여 온천천溫泉川을 이룬다. 다만 오지라서 이 나라 사람들조차 찾는 이가 드물다.

 

혈기 왕성했던 20대에 나는 설산을 넘겠다며 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 중국 윈난 성과 티벳탄이 사는 시좡자치구 사이를 트레킹 했다. 대중교통도 없어서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타고, 가다 내려서 사나흘을 걸어 들어가면 사람이 살까 싶은 황량한 마을과 진흙으로 지은 집들을 마주한 적이 있다. 볼리비아의 이 마을이 딱 그 느낌이었다.

 

아무리 오지라 해도 한국인 중 누군가는 다녀갔겠지 싶었는데 녹색 검색창을 뒤져 보아도 다녀갔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니 아무래도 이곳을 다녀간 한국 사람은 그 여자와 나, 단둘뿐인듯 하다. 간혹 사람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다녀온 적 있는가?’라고 묻는다. 다른 사람 모르는 여행지 하나쯤 두고 싶은 마음, 우리라고 왜 없겠는가. 그 욕심이 우리를 아구아스 깔리안떼스로 이끈 건 아니었을까?


별이 흐르는 강

 

 

남녀,-여행사정-36-02@아구아스-깔리안떼스.jpg

       보석처럼 반짝이는 너희들을 갖고 싶구나

 

 

차편도, 숙소도, 위치도 무엇 하나 건질 수 없는 친구의 말만 믿고 마을에 도착했다. ‘아무도 가 보지 않은 장소’가 우리를 현혹했다. 이곳은 사람보다 닭, 돼지, 당나귀와 말, 소 등 가축들이 더 많았고, 변변한 슈퍼나 식당은 찾을 수 없었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숙소에는 시멘트 바닥에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고 유리창이 있을 자리에 커튼이 바깥과 실내를 구분할 뿐이다. 인터넷과 온수는커녕 백열등 하나 겨우 들어오는 깡 시골이다.

 

하루는 종일 미드를 보고 하루는 종일 해먹에서 뒹굴다가 하루는 종일 온천에 가는 날이 전부였다. 관광 인프라도 상술도 없는 소박한 동네였다. 성인 어른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맑은 강에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을 즐길 수 있고 이곳 태생인 닥터 피시에게 발을 맡기며 치유의 효능을 맛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을의 하이라이트는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면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아직도 지각활동을 하며 땅 깊숙한 곳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뜨거운 물은 흡사 늪지를 연상시킨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처럼 이 온천에도 강바닥에 깔려있는 모래 구덩이가 사람을 빨아들인다.

 

누군가가 붙잡아 주지 않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가는 무시무시한 온천이라니! 아구아스 깔리안떼스에 가면 이 진귀한 온천을 만날 수 있다. 지각활동을 활발히 하는 기 센 온천이라 그랬을까? 온천욕을 하고 난 후로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내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온천욕을 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숟가락을 드는 둥 마는 둥 입맛이 없어지고 밤새 오한으로 떨어야 했다. 잇몸은 피가 나면서 헐기 시작하고 입술과 혀에는 염증이 생기고 심한 악취가 풍겨왔다. 그 남자는 이것을 ‘구내염’이라고 했다. 영양분을 채워줘야 하는데 잇몸이 헐어서 음식을 씹지 못하고 칫솔질을 잘 해줘야 하는데 피가 나니까 닦지 못했다.

 

기 센 온천을 소개해 준 친구에게 미지의 세계를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는 차마 못 건네겠다. 이럴 땐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의 선택이지 않은가! 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행객이 없는 곳에 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 남자와 아구아스 깔리안떼스를 선택한 건 이런 도취감에 빠져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 못 하겠다. 사람들이 가 보지 못한 곳을 말함으로써 우리의 여행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던 것이다.

 

비록 온천욕 때문에 앓아누웠지만 아구아스 깔리안떼스는 이런 욕망을 충족시킬 만한 특별한 여행지임은 사실이다. 내 몸을 삼켜 버린 괴랄한 온천과 더불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장소’인 이곳을 추천하는 이유는 밤하늘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목이 뒤로 꺾일 때까지 별이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하늘뿐 아니라 어둠 전체가 별로 반짝이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기가 들지 않은 마을임을 감사해 하며 별들이 흐르는 강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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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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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수녀님, 어쩐 일이세요?”

 

김희정 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출입문 앞에 마르타 수녀가 서 있었다. 봉사활동을 나갈 때 만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수녀가 반딧불 의원을 직접 찾은 건 개원식 이후 처음이었다.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 아닌가 몰라요.”

 

“무슨 말씀을요. 진료 끝나려면 세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 걸요. 마침 적당한 때 오셨어요. 이 시간엔 환자가 뜸하거든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저야 하루하루 똑같아서 심심한 일상이에요. 수녀님은요?”

 

“좋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내 나이가 되면 큰 변화가 없는 게 다행스러운 거죠. 하루하루 탈 없이 보내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에요.”


마르타 수녀는 습관처럼 성호를 그었다.


“이 나무, 그때 그 아이 맞지요? 많이 자랐네요.”

 

수녀가 가리킨 화분은 일 년 전 개원식 날 그녀가 보낸 것이었다. 그날 수녀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행운목은 10년에 한 번쯤 꽃을 피우는데 꽃이 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은 김희정 씨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동안 나무의 키는 몇 뼘쯤 자랐고 파릇한 색깔도 선명해졌지만 꽃이 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 분무기로 물을 뿌린 뒤 잎을 닦아주며 생각하곤 했다. 이 나무에 꽃이 피는 걸 볼 수 있을까.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표류하던 그녀를 기슭으로 인도해준 존재가 마르타 수녀였다. 술에 취해 십자가에 대고 욕이라도 하려고 들어갔던 성당에서 수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녀는 지금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곳에 오기 전만 해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건 닿지 못할 꿈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녀에겐 이곳에서 보낸 것보다 더 긴 시간 이후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가능했다. 평범한 삶을 지속할 수만 있다면 꽃이 피는 것쯤 보지 못해도 상관 없었다.

 

“수녀님 오셨어요?”

 

진료실 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김희정 씨의 회상은 멈춰 섰다. 그러고 보면 그녀를 기슭으로 끌어올린 건 마르타 수녀만은 아니었다.

 

“이 선생님, 옛날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진료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의사와 마주앉은 수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살았어요. 한 3년 정도였나. 마당에 큰 감나무가 있는 집이었어요. 외할아버지가 날 참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당신에게 첫 손녀였으니까요. 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곤 하셨지요. 아마 동네 친구분들께 자랑하고 싶으셨나 봐요.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자전거 뒷자리에서 할아버지 허리춤을 꼭 붙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보던 풍경이 생각나네요. 할아버지 콧노래 소리도요.”

 

수녀는 지그시 미소를 머금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깨 너머로 한글을 배웠는데 간판의 글자를 곧잘 읽곤 했지요. 외할아버지께선 종종 눈이 어두워져 글자가 안 보인다고 제게 신문을 읽어달라 하셨어요. 사실은 또박또박 신문을 읽는 손녀딸 목소리를 듣고 싶으셨던 거지요. 아버지 얼굴도 몰랐던 내게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어요.”

 

의사는 수녀의 이야기에 리듬을 맞추듯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책상을 두드렸다.

 

“독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어머니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난 고등학생이었지요. 공항에 도착했을 때 외삼촌이 마중을 나오셨어요. 외할아버지는 며칠 뒤 외갓집에 내려가서야 뵐 수 있었는데 예전에 내가 알던 분이 아니었어요. 어렸을 적 기억엔 항상 환하게 웃어 주셨는데 10년 만에 날 보고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왔냐고, 짧게 말씀하실 뿐이었지요.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그 표정이 무섭기도 했어요. 그때 왜 와락 겁이 났을까. 십 년 만에 외할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난 제대로 안아 드리지도 못했지요.”

 

수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날 나에게 화가 나셨던 게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할아버지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어요. 마당 감나무 밑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구부정한 자세로 아기처럼 종종걸음을 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요. 거실의 안락의자에서 하루 내내 앉아 계시던 것도. 팔걸이에 올린 손이 덜덜 떨렸어요. 손떨림이 심해져서 나중엔 혼자 식사하기도 어려워지셨는데, 할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온 날은 어머니가 많이 우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몇 년은 요양원에 계셨지요.”

 

수녀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손떨림이 심해졌어요. 손이 떨리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되었는데 요즘 부쩍 더하네요. 아침마다 성경을 필사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해왔는데 이제 그것도 힘이 들어요. 올 가을부터 허리가 뻐근하고 왼쪽 다리가 저려서 걸음걸이가 불편했는데, 며칠 전 복도를 지나다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봤어요. 구부정한 모습이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 모습을 닮았더군요. 그러고 보면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연세가 지금 내 나이쯤 되었겠네요. 이 선생님, 난 내가 외할아버지처럼 파킨슨병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이 돼요.”

 

의사는 몇 가지 신경학적 진찰을 한 뒤 책상 위의 종이에 간단한 문장을 쓰고 아래에 나선 모양을 그리도록 했다. 볼펜을 잡은 마르타 수녀의 손과 함께 종이 위의 글자와 나선도 물결처럼 흔들렸다.

 

“수녀님께선 파킨슨병에 걸린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손이 떨리는 걸까요.”

 

“본태성 떨림이라고 부르는 질환입니다. 왜 생기는지 이유는 잘 모르지만 유전적인 성향이 있다고 해요. 부모님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나요?”


“어머니는 없으셨지만 아버지는 확실치 않아요.”

 

“파킨슨병으로 인한 떨림은 대개 가만히 있을 때 생기지만, 본태성 떨림은 글씨를 쓸 때나 숟가락을 사용할 때, 물컵을 들 때처럼 손으로 일을 할 때 생겨요. 걷는 데 문제가 생기지도 않구요. 생활하는 데는 불편함이 있을 수 있지만 파킨슨병처럼 심각한 질환은 아닙니다.”


“아, 정말 다행이에요.”

 

마르타 수녀는 한숨을 내쉬고 성호를 그으며 말을 이었다.

 

“또 하나 걱정은… 술을 마시면 손떨림이 멎더라구요. 그래서 요즘 술을 자주 마시게 되네요.”


“본태성 떨림은 술을 마시면 좋아지는 특징이 있어요. 그렇다고 술을 드시라는 이야긴 아니구요.”

 

의사는 말을 끊고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수녀님도 아시겠지만 손떨림은 알코올중독 환자에게도 흔한 증세죠. 저도 손이 떨리는 걸 사람들이 알아챌까봐 떨림이 느껴질 때마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두드리던 게 버릇이 되어버렸네요.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신 지 오래지만 지금도 긴장을 하거나 피곤하면 떨리곤 합니다.”


“난 전혀 몰랐어요.”


“같은 손떨림인데 수녀님은 술을 마시면 낫고 저는 술을 마시면 나빠지는군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푸념 섞인 말투에 마르타 수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술보다 더 효과적인 약을 처방해 드릴께요.”

 

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 선생님이 밤에 여는 병원을 열겠다고 했을 때는 세상과 관계를 끊고 싶어하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는 것 같기도 했구요. 그런데 그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세상과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선생님은 진료실에 있을 때 가장 좋아 보여요.”

 

“그런 거창한 생각까지 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밥벌이를 해야 하고 밤에 일하는 게 편했을 뿐입니다.”

 

진료실을 나오는 마르타 수녀에게 김희정 씨가 처방전과 함께 작은 갈색 종이 가방을 건넸다.

 

“지난달 강릉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수녀님 생각이 나서 샀어요.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다음에 드려야지 했는데 마침 오늘 뵙게 되네요.”


“고마워요, 희정 씨. 난 매번 받기만 하네요.”


“향기가 좋다고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수녀님.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많이 드시면 손떨림이 심해질 수 있거든요.”

 

뒤따라 나온 의사의 냉랭한 말투에 김희정 씨는 마르타 수녀를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혀를 쑥 내밀었다.

 

“어머, 꽃망울이 맺혔네. 곧 꽃이 필 것 같아요.”

 

행운목 잎을 찬찬히 바라보던 수녀가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손짓에 김희정 씨도 신기한 듯 꽃망울을 바라보았다.

 

“내년엔 좋은 일이 있을 건가 봐요.”


“희정 씨, 혹시 국수 얻어먹을 일 생기는 거 아니에요?”


“아유, 수녀님도. 그럴만한 일이 전혀 없는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네요.”

 

두 눈이 동그래진 김희정 씨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인 마르타 수녀의 웃음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박스 위 사진 2.jpg        

     언스플래쉬 

 

 

본태성 떨림(Essential Tremor)은 가장 흔한 떨림증 중 하나다. 흥분하거나 불안할 때 몸을 떠는 것은 누구나 겪는 현상이지만 본태성 떨림의 경우엔 이런 상황과 무관하게 떨림이 발생한다.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가족 구성원 내에 동일한 증상이 있는 경우가 많다.

 

손떨림이 생기면 대개 중풍이나 파킨슨병을 걱정해 병원을 찾는다. 병력에 대한 상담과 신경학적 진찰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이들 질환과 본태성 떨림을 구별할 수 있다. 본태성 떨림은 글씨를 쓸 때, 숟가락을 사용할 때, 컵으로 물을 마실 때와 같이 손을 사용한 작업을 할 때 주로 나타난다. 반면 파킨슨병은 가만히 있을 때 본인도 모르게 떨림 증상이 나타난다. 또한 본태성 떨림은 떨림 외에 다른 증상이 드물지만 중풍이나 파킨슨병으로 인한 떨림은 보행 장애나 동작 이상 증상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파킨슨병의 경우 다리를 끌면서 걷거나 몸의 동작이 느려지는 등의 증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본태성 떨림이나 파킨슨병 이외에 갑상선 항진증 등의 질환도 떨림을 유발할 수 있다. 이 경우 체중 감소나 더위를 잘 못 참는 등의 전신 증상이 함께 있을 수 있으며 갑상선 기능에 대한 혈액 검사로 쉽게 진단할 수 있다. 천식 환자에게 쓰는 기관지 확장제나 기침약도 손떨림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이와 같은 약을 복용하는 경우에는 약으로 인한 증상이 아닌가 의심해보아야 한다.

 

본태성 떨림은 손이나 고개가 떨리는 증상 이외에 다른 이상은 나타나지 않으며 비교적 심각하지 않은 병이다. 그러므로 증상이 심하지 않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꼭 치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약물 치료 효과가 좋은 편이므로 일상생활과 대인 관계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증상이 있다면 의사와 상의하는 것이 좋다. 단기간 치료한다고 완치되지는 않으며 대개 약을 평생 먹어야 하지만 부작용이 심한 약은 아니므로 적절히 복용하면 큰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다. 술을 마신 뒤에 떨림이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 있지만 술로 치료하려는 것은 금물이다. 알코올중독이 되면 떨림이 더 심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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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목적지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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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큰 배가 앞으로 나아 가는지, 뱅글뱅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지.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배 안에는 호텔처럼 수많은 객실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턱시도를 차려입고 정찬 식사를 즐기거나 중식, 일식, 서양식이 차려진 뷔페를 맛볼 수 있다. 그게 귀찮다면 방 안에 누워 룸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먹기만 하면 살이 찌니 옥상 데크로 올라가 트랙 위에서 조깅을 하고, 수영장 안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자쿠지에서 휴식을 즐긴다. 암벽등반, 미니 골프, 아이스 스케이팅과 같은 액티비티가 지겨워지면 뮤지컬과 디너쇼를 관람한다. 카지노, 주류, 인터넷을 제외하고는 이 모든 서비스가 무료이다. 담당 웨이터와 하우스 키퍼에게 주는 팁도 크루즈 금액에 포함되어 있다. 고로 결제가 끝나면 배 위에서 돈 쓸 일이 없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별 4~5개짜리 거대한 리조트 호텔이 바로 크루즈이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이라도 타 보길 꿈꾼다는 크루즈를 그 남자와 나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주로 향하며 한 번, 파나마 운하를 건너 남미로 향하며 또 한 번을 이용했다. 한 달씩 살아보는 여행자 아니랄까 봐 배 위에서도 한 달을 보냈다. 배에서는 시간의 흐름이란 게 무의미하다.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동안 배가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멈춰서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 년의 1/3은 여행하며 살고 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으니 역마살 기질이 다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남자와 나는 여러 면에서 안정과 익숙함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여행 후 돌아갈 곳을 늘 그리워한다. 항구를 떠난 배는 다시 항구로 돌아간다는 믿음처럼, 우리의 삶에도 회기 할 곳이 있다는 건 단순한 안도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는 비록 전세이긴 하지만 서울에 머무를 집이 있다. 외부에서 몇 차례 미팅을 해치우고 온 날에는 ‘sweet, my sweet home’를 읊조리며 현관문을 열고 그 안락한 공간에 감사해 한다. 그러니 두세 달 이상의 장기 여행을 뒤라면 그 애착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부모님, 친구, 한식보다 더 반가운 내 집이다.

 

‘언제까지 여행하며 살 것인가?’를 묻는 이들이 많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떠돌며 사는 삶의 불안함일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우리의 불안함은 어딘가에 정착하여 고인 물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다.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이 없다면-아시다시피 여행은 오감이 충족되는 경험과 활력을 전해 준다- 금방이라도 늙어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있던 세계는 9 to 6에 귀속되는 삶, 화장을 해야 하는 삶,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삶, 휴가 때마다 짧은 여행을 하는 삶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 표를 쥐어 든 순간, 그리하여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된 지금 어떠어떠한 부류에 속하지 않고도 나답게 살 수 있는 ‘프리패스’를 얻게 되었다. 그 남자와 내가 또래의 직장인 친구보다 젊어 보이는 데에는 ‘여행’이 건네주는 낯선 자극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낯선 화폐, 생김새가 다른 얼굴, 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문화의 다름 등에서 오는 잠깐의 긴장이 흥분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할 때마다 여행을 지속시켜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는다.

 

움직인다는 것에 대한 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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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의 해는 오늘도 떠오르고.

 

크루즈 여행의 장점은 무감각한 이동에 있다. 기항지 관광을 마친 후 배로 돌아와 놀고먹고 자고 나면 어느새 또 다른 도시에 도착해 있다. 이동의 수고는 거대한 배에게 맡겨두고 즐기는 것만 신경 쓰면 된다.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는 여행객들은 잠시나마 걱정을 내려놓고 배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된다. 이보다 편한 여행 법이 또 있을까!

 

하나 이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매일 기항지가 바뀌는 보통의 크루즈 여행이 아닌 대서양이나 태평양 같은 망망대해를 건너는 배라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배 안에서만 있게 된다. ‘거대한 배’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풍경의 바다 위에서 며칠씩 떠 있다 보면 이대로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배가 움직이고 있기는 하는 건가?’라는 계속된 물음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 여자와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모호하다. 안온한 일상을 그리워하지만 이내 기내용 캐리어에 옷 몇 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다시 비행기에 오른다. 길 위에서 또다시 연말을 보내고 있는 지금,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여행자로 산 지 6년 차가 되어 간다. 매해 연말을 해외에서 보내고 있는데 지난 한 해를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이 꽤 멋진 ‘돌아봄’을 선물해 준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하며 다른 문화의 생활자로 사는 한 나를 가두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세상의 여러 관점을 접할 기회와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을 배웠다. 누구보다 안정을 갈망하지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다.

 

사람을 태워 나르는 배의 입장에서는 기항지가 바뀌나, 망망대해에 떠 있으나 매번 열심히 다음 목적지를 향해 파도를 헤쳐 나간다. 하룻밤 지나면 어제보다 목적지에 가까워진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티 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배는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움직인다는 확증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해를 넘긴다 해도 우리 일상에 특별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질 것이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변화 없는 만고의 진리이지만 뭔가 변화의 시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불안함 때문이다. 일 년이 지나고 새해가 다가오니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다. 거대한 바다 앞에서 나는 움직이고 있다는 확증을 받고 싶은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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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은 왜 그 모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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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연말입니다. 올해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기 키우는 입장에서 <안아키> 사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자 혁명>이란 책입니다. 두 가지 사건을 면밀히 추적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띕니다. 의사와 현대의학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겁니다. 두 권의 책 모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펼치지만 맹신하는 분들은 ‘정의의 사도’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의료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잘 되는 소아과를 접는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정신 나갔다고들 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더 이상 환자들과 신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진료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간 한국을 자주 드나들며 병원에도 갔습니다. 그때마다 의료 현장이 갈수록 황폐화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의사들은 무기력하고 불행했으며, 정부는 무책임하고 무관심했고, 환자들은 불안하고 화가 나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들면 이내 기가 질려버립니다.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책으로 몇 권쯤은 쓸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라고요? 그럴 지도 모르지만 의료만큼 피부에 와 닿는 분야는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누구나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마다 견해와 해석이 다양합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을 싫어하죠. 그래서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듯 단칼에 정의해버립니다. “의사들이 나쁜 놈들이야!” 우리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렇게 수십 년을 끌어온 결과입니다. 그럼 어쩌란 거야? 짧은 글은 많은 오해를 부를 수 있지만, 문제가 시급하기에 몇 가지만이라도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의료의 주체는 국민-정부-의사입니다. 각 주체들이 당장 했으면 하는 일을 두 가지씩 정리해보았습니다.


1. 의사 - 일단 “나쁜 의사”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쁜 의사란 돈에 양심을 파는 의사와 공부를 게을리하여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의사입니다. 그간 의사들은 모든 의사가 양심적이며, 자격에 걸맞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나쁜 의사는 실재합니다. 진실을 외면한 대가는 혹독하여 이제 썩은 사과를 추려내지 않으면 궤짝 속의 사과가 몽땅 썩어버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의료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라 나쁜 의사를 제대로 감별할 수 있는 것은 의사들뿐입니다. 전문가 집단이 ‘자정’하지 않으면 ‘타정’당한다는 건 역사의 교훈입니다. 보통 ‘타정’이 ‘자정’보다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소통에 힘써야 합니다. 의료의 문제를 비의료인에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놀랄 만큼 소통 전략이 없어 보입니다. SNS를 활용할지, 언론 매체나 책을 활용할지,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누가 설명할지, 설득 대상은 누구인지 고민이 부족합니다. 읽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글을 써놓고 자기들끼리 환호하며 박수를 보냅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소통과 설득 전문가는 넘쳐납니다. 설득과 소통도 의료만큼이나 전문 분야입니다. 의료계 내부에도 국민의 존경을 받고 글도 잘 쓰는 분들이 많죠. 사령탑을 세우고 필요한 분들을 모셔와 정부 및 국민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걸 왜 꼭 우리가 해야 하느냐고요? 아무도 의료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소통은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자 지식인의 책무입니다.


2. 정부 - 통계와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현장과 인간을 바로 보세요. 저수가를 얘기하면 원가보전율을 놓고 입씨름이 벌어집니다. 외상센터와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사고가 나면 지원 예산을 줄였느니 아니라느니 티격태격합니다. 물론 정부는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죠.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칫 실수를 하는 날에는 ‘한 방에 가는’ 의사들의 위치입니다. 양심에 따라 처방한 약이 엉성하게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삭감 당하고, 부당청구로 몰려 순식간에 비양심적인 사람이 돼 버리는 기막힌 꼴을 겪어보지 않은 의사가 거의 없습니다. 현장에서 어떤 부조리한 일이 벌어지는지, 왜 의사들이 하나같이 절망하는지를 숫자가 아닌 스토리로 파악하라는 겁니다.


싸움을 붙이지 말고 오해를 해소하는 편에 서주세요. 우리는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의료수요를 놀랍도록 싼 값에 해결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의사도 불행하고, 국민도 불행합니다. 그간 정부는 의사가 불의한 집단이란 생각을 부채질하거나, 최소한 방조해왔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큰 자산이 무얼까요? 서로 신뢰하는 겁니다. 모든 걸 시스템이나 법조문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신뢰하는 사회는 갈등이 적고, 더 행복하며, 더 적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것들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사실 의사들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건 이전 정부에서 오래도록 약속을 어겨온 탓도 큽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니 그런 부분을 솔직히 밝히고 사과한 후 밀린 책무를 이행한다면 서로 신뢰를 회복하고, 국민들의 오해를 일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3. 국민 - 무엇보다 의료는 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의료는 의사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군대가 장군들의 것이 아니듯, 생로병사라는 삶의 가차없는 수레바퀴 밑에서 가장 힘들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의료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겁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데, 그 기준은 과학에 있습니다. ‘과학이 무조건 옳은 것이냐?’고 따지는 분도 있는데, 늘 말하지만 과학이란 ‘그 말이 옳다는 증거가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옳은지 그른지 증거도 없는 곳에 피땀 흘려 번 돈을 쓸 수는 없잖아요? 의사들이 미우니 현대의료를 거부하고 비과학적인 것을 좇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과학적인 쪽에 힘을 실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의사가 되는 젊은이들도 모두 우리 자식입니다. 이제 막 의사가 되어 죄를 지을 시간조차 없었던 사람을 “돈 밖에 모르는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는 게 옳은 걸까요? 모든 의사가 결국 그렇게 된다면 그건 사람 탓이라기보다 제도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의료/의료인에 대한 감정적/이분법적 비난은 양심적인 의료인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국민보건에도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패키지(package)화된 사고를 경계하세요.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외세에 의해 강제된 역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에서 유래한 것에 대한 반감이 유난히 심합니다. 그간 권위적이고 부패한 정권에 의해 저해되어 온 건전한 시민사회에 대한 열망도 강하죠. 자본의 폐해를 혐오하며 자연적인 것, 환경친화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다 좋아요. 문제는 이것들이 각기 따로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패키지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정치적 진보-기본소득-탈원전-페미니즘 지지자들이 해열제를 먹이면 면역이 약화된다고 40도가 넘어가는 아이를 방치하고, 거대제약자본의 음모라고 혈압약을 거부하다 치매에 걸리고, 초기에 손 쓰면 완치할 수 있는 암을 자연적으로 치유한다고 버티다 아까운 목숨을 잃습니다. 현대의학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거대자본의 노예니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느냐’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과학과 의학에는 내 편, 네 편이 없습니다. 굳이 편을 갈라야 한다면 충분한 근거가 있으면 우리 편이고, 근거가 없이 신념이나 희망에 의존한다면 적입니다. 자신의 다른 신념과 일치한다고 해서 비과학적인 말을 믿고 따르지 마세요.


‘의사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 의료의 건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뜻입니다. 면역이 심각하게 저하되면 별 것 아닌 병원체도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이 너무 깊어지는 것 같아 급한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물론 주제넘은 소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어릿광대라도 나서야 하는 법입니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더 좋은 생각과 해결책을 제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났습니다. 일년 간 보잘것없는 글을 읽고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새해에도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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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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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당뇨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작성자: 크림빵  작성일: 2017-12-01 15:38:24 (152.248.***.36)

 

한 달 전에 건강검진을 했는데 공복 혈당이 140이라고 합니다. 126부터는 당뇨병이라고 하네요.

 

작년 건강검진 결과를 찾아보니 그때는 혈당 수치가 110었더군요. 당뇨병 전 단계 판정을 받았었는데 이후로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부서가 바뀌고 일이 많아져서 운동을 전혀 못한 지도 몇 개월 되었습니다. 체중이 늘어서 160센티에 70킬로까지 나갔다가 지금은 3킬로 감량한 상태예요. 의사 선생님이 지금은 초기라 일단 약을 먹지 않고 관리해보자고 하는데, 대신 반드시 체중을 줄여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당뇨병은 완치가 안 되는 병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각한 합병증도 많구요. 혈관 계통에 문제가 생겨서 중풍이나 심장병은 물론이고 시력을 잃거나 신장이 망가져 투석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 나이 겨우 40대 초반인데, 무섭고 막막하네요. 약을 먹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약을 평생 먹는다면 부작용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저처럼 당뇨병 진단을 받은 사람이 노력하면 다시 정상 수치로 될 수 있는 건가요? 정상 수치로 갈 수 있다면 노력해 보려구요.          

 

벼랑위의당뇨      작성일: 2017-12-01 15:40:10 (125.189.***.52)
당뇨에 걸리면 다음 세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다음, 다뇨, 다식. 확인해보세요.

 

Nato      작성일: 2017-12-01 15:50:05 (121.191.***.12)
당뇨병 앓은 지 2년 째입니다. 위의 분이 말씀하신 증상은 당뇨병 초기엔 안 나타날 수도 있어요. 당분간 혈당 변화를 좀 지켜보셔야 할 겁니다. 저는 약 먹고 아침 공복 혈당 120대, 식후 2시간 180 이하로 유지 중입니다. 그리고 공복 혈당 수치보다 최근 3개월 간 평균 혈당에 해당하는 당화혈색소 수치가 중요합니다. 피 검사 자주 해보시고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따르셔야 합니다.

 

아메리카노      작성일: 2017-12-01 16:15:32 (172.112.***.58)
관리 잘 하면 좋아질 수 있어요. 우리 남편도 작년에 실직하고 난 뒤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매일 술을 마시면서 혈당이 150까지 올라 당뇨병 진단을 받았어요. 다행히 재취업이 되면서 맘이 편해지고 매일 한 시간씩 걷기 운동을 하더니 지금은 110까지 떨어졌어요. 남편도 아직 약은 안 먹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기운 내세요.

 

Firefly      작성일: 2017-12-01 16:16:25 (110.53.***.44)
당뇨병이 평생 관리해야 하는 병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관리를 잘 하면 평생 큰 합병증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맞아요. 초기 관리가 중요하니 지금 열심히 노력하셔야 합니다. 보통 당화혈색소 7퍼센트 미만을 목표로 하지만, 님처럼 젊은 분들은 6.5퍼센트까지 낮추면 더 좋습니다. 의사 권유대로 체중을 줄이는 게 가장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비만 체중을 정상까지 감량하고 나서 혈당 조절이 잘 되어서 먹던 약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자혁명      작성일: 2017-12-01 16:21:55 (225.19.***.32)
당뇨병이 심각한 합병증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당뇨병에 대한 지나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공복 혈당이 110까지는 정상이었는데 몇 년 전부턴 100 이상이면 비정상이라고 하더군요. 당뇨병이 있을 때 당화혈색소도 예전엔 7퍼센트 미만으로 유지하면 된다고 했는데 요즘은 6.5퍼센트까지 낮춰야 한다고 하죠. 이전보다 더 일찍부터 약을 먹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해서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일까요? 제약 회사나 의사들에겐 도움이 되겠죠. 그냥 당뇨병 환자를 늘리기 위한 거란 의심이 듭니다.

 

몸신      작성일: 2017-12-01 16:50:55 (35.119.***.11)
동감입니다.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얼마 전엔 미국에서 고혈압 기준을 130/80으로 낮춰서 고혈압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가 수백만 명이 늘었다고 하더군요. 평생 약을 먹으면서 생기는 부작용도 많다고 하던데, 멀쩡한 사람들을 환자로 만드는 의사나 제약 회사도 양심선언 해야 하지 않을까요?

 

Kauri      작성일: 2017-12-01 16:59:01 (321.23.***.43)
기준을 넘었다고 바로 약을 먹어야 하는 건 아닐 텐데요. 미리 관리하고 예방하자는 취지에서 기준 수치를 낮춘 거라 알고 있습니다.

 

엑스파일      작성일: 2017-12-01 17:10:51 (122.19.***.50)
병에 대한 기준이라는 게 합병증이나 예후 등을 종합해서 정해지는 거죠. 암의 병기(病期) 기준 같은 것도 변하거든요. 새로운 연구 결과가 쌓이면서 과거에 정해진 기준도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약 회사 운운하는 건 음모론이라고 봐요. 이런 이야기에 솔깃하는 분들은 교회나 절에 가보시길 권합니다. 음모론을 믿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종교를 믿는 것과 다를 게 없거든요. 요즘은 오히려 이런 음모론을 팔아 이득을 얻는 가짜 전문가들이 많아 보여요.

 

명란젓코난      작성일: 2017-12-01 17:15:24 (119.111.***.85)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Firefly      작성일: 2017-12-01 17:25:20 (110.53.***.44)
정상 혈당과 당뇨병 사이를 공복혈당장애라고 부르는데 이 기준을 110에서 100으로 낮춘 것은 그저 몇몇 의사나 제약회사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많은 전문가들의 논의가 있었고, 연구를 통해 확인했을 때 100을 넘으면 당뇨병이 생길 위험이 더 높다는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바뀐 거예요. 최근 미국 심장학회에서 고혈압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고 해서 이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바뀐 기준이 나오게 된 이유는 140/90일 때보다 120/80을 목표로 관리했을 때 사망 위험이 더 낮았다는 연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꼬부기      작성일: 2017-12-01 17:35:10 (225.111.***.24)
여주가 당뇨병에 특효라고 합니다. 천연 인슐린이라고 하던데요. 저희 어머니도 당뇨병이 있으신데 여주 달인 물을 매일 드시고 혈당이 많이 좋아지셨대요.
 
천기누설      작성일: 2017-12-01 17:44:15 (130.191.***.11)
저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께서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으셨어요. 당뇨병에 대해선 거의 박사 수준입니다. 그분 말씀이 여주도 좋지만 돼지감자와 양파즙이 특히 효과가 좋다고 하시더라구요. 얼마 전 케이블 프로그램에 나온 의사도 당뇨병에 돼지감자가 좋다고 하던데, 최근에 저도 건강검진에서 혈당이 좀 높게 나와서 돼지감자 달인 물을 매일 마시고 있습니다.

 

불량감자      작성일: 2017-12-01 17:45:36 (115.211.***.91)
(관리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Firefly      작성일: 2017-12-01 17:58:55 (110.53.***.44)
요즘은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건강에 대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실과 다른 사이비 정보가 너무 많다는 거죠. 밀가루 약만 먹어도 3분의 1은 증상이 좋아집니다. 개인의 경험은 이런 플라시보(placebo) 효과일 수 있어요. 의사, 한의사, 건강전문가라는 분들이 나와 하는 이야기도 과장된 내용이 많으니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오래전엔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이 많았지만 지금은 많이 먹어 생기는 병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떤 병이든 무언가를 먹어서 해결하려고 하죠. 당뇨병에 좋다는 음식도 많아요. 하지만 혈당이 덜 올라가는 음식은 있어도 거꾸로 떨어지는 음식은 없습니다. 현미밥을 흰 쌀밥 대신 먹으면 혈당이 덜 올라가듯이 이런 음식들을 밥 대신 먹는다면 혈당이 덜 올라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막연히 당뇨병에 좋다고 수시로 먹어선 안 됩니다. 그리고 당뇨병 약을 먹다가 당뇨병에 좋은 음식으로 치료하겠다고 먹던 약을 임의로 끊는 것은 더 위험합니다.

 

아보도오루      작성일: 2017-12-01 18:11:11 (188.211.***.32)
서양 의학의 치료 방법은 거의 모두 증상만을 없애는 대증 요법입니다. 당뇨병이 있으면 혈당을, 혈압이 높으면 혈압을 내리는 약을 처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모두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에 나타나는 현상을 강제로 잠시 덮어두는 치료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부작용이 항시 존재하게 됩니다. 당뇨병 약도 심각한 부작용을 만들 수 있어요. 우리 몸은 스스로 대사를 조절해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항상성이라고 하는데, 이 항상성이 유지될 때 면역력도 최고가 됩니다. 항상성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깨뜨려서 나타나는 것이 약의 부작용입니다. 증상이라는 것은 일종의 몸의 신호이고, 이런 신호를 잘 살펴서 원인을 치료해주는 것이 좋은 치료법입니다. 그것을 무조건 없애는 형태의 치료는 인체의 대사작용을 억지로 차단하거나 촉진시켜 반드시 다른 곳에 영향을 주게 되고 그것은 또 다른 부작용과 질병으로 이어집니다. 항상성과 우리 몸의 자연적인 면역력을 잘 유지해주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입니다.

 

소람      작성일: 2017-12-01 18:21:15 (120.11.***.56)
제가 잘 아는 한의사 분은 당뇨병도 완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당뇨병 약을 먹는 것은 췌장을 인위적으로 짜내기 때문에 결국 췌장이 굳어버린다고 하더라구요. 당뇨병 약을 먹는 환자도 1년 정도만 꾸준히 한약을 복용하면 약을 끊는다고 하셨어요. 쪽지 주시면 한의원 위치 알려드리겠습니다.

 

Firefly      작성일: 2017-12-01 18:30:25 (110.53.***.44)
혈당이 올라가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이지만 약으로 혈당을 낮추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를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혈당을 낮추는 것이 당뇨병의 합병증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과학적 연구로 수없이 증명된 사실이에요. 안타깝지만 당뇨병을 ‘완치’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현대 의학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한 것이 아니므로 틈새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틈새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메우려는 노력해온 것이 의학의 역사이고 과학의 본질입니다. 사이비 전문가들은 이런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이런 사람들 입장에선 병원과 의사에 대한 불신이 늘어날수록 좋습니다. 요즘 사이비 전문가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도 여러 이유로 병원과 의사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대 의학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과학적 근거가 없는 사이비 전문가의 대안을 따라가는 것은 호환마마보다 더 위험합니다.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환자들입니다.

사이비 전문가에게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힘들고 귀찮지만 결국 환자가 좀 더 똑똑해져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요즘은 한글로 된 논문들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쉽게 쓸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드릴께요. 일반적인 의사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전문가는 일단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편 채널에 자주 나오는 전문가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 게 건강에 더 이롭습니다. 아, 사이비 전문가들도 유행을 타는데 요즘엔 면역력이란 단어가 뜨는 것 같더군요. 이런 단어를 자주 쓰는 분들이라면 일단 거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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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발표된 국내 소비자 건강 정보 제공 경로에 대한 대한의학회 보고서에 따르면 의료인 등 전문가에 비해 인터넷, TV 프로그램, 신문이나 잡지, 가족이나 지인 등으로부터 건강 정보를 얻는 비율이 월등하게 높았다. 그중에서도 인터넷과 TV는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경로이며 이들을 통해 제공되는 건강 정보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건강 정보는 태생적으로 정보 제공자와 소비자 간에 비대칭성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인터넷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나면서 이로 인한 부작용도 커지고 있다. 올해 이슈가 된 ‘안아키’라로 불리는 자연치유 카페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정 한의사의 치료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 이 카페에서는 수두에 대한 면역력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두에 걸린 아이들과 접촉하게 하고, 아토피 피부염 치료를 위해 피부를 긁어내고 햇볕을 쬐라고 권하는 등 잘못된 건강 정보로 아동 학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최근에는 TV에서 예능 형식의 건강 정보 프로그램을 쉽게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쉬운 내용을 주로 다루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이나 특정 사례를 마치 과학적으로 검증된 정보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서울대학교 언론정보연구소 박아현 박사는 건강 정보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분석한 논문*에서 “특정인의 체험 사례를 과대 포장하여 일반화하거나 특정 사례를 바탕으로 특정 치료법이나 식품의 효과를 단정적으로 표현하여 시청자들에게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건강 정보 프로그램에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 라고 지적했다.

 

* 박아현, “최근 건강의료정보 프로그램의 경향 및 문제점”, <J Korean Med Assoc>, 2016 October; 59(10): 757-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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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 하얀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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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6일. 아직 재건축 바람이 불지 않았던 망원동 한 주택가에서 하루 종일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당시 대학생이던 내가 보고서를 쓸 무렵부터 마칠 때까지 였으니 적이 네 다섯시간은 되었을 터다. 나는 홀린 듯 ‘시끄럽다’와 ‘저놈이 왜 우나’ 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왔고, 소리의 근원은 옆집이었다. 훌쩍 높은 담벼락과 강철살 대문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이 초인종을 누르면 인생에 고양이가 들어올 수도 있어. 숨을 크게 쉬고 그 집에 간단한 보고를 알렸다. 소리를 찾아 돌아 들어가 보니 지하로 내려가는 폭이 좁은 계단 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여느 모로 도저히 혼자, 혹은 다른 고양이의 도움으로도 나올 수 없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고양이가 왔다. 작고 엉성한 걸음새. 밥을 내주어도 그릇 가생이에 주둥이가 닿는 느낌이 어색한지 거푸 헛입만 켜는 이 멍청한 고양이에게 똑똑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프란츠 파농. 온통 검은 털에 눈가만 희미해 흰 것이나 다름없는 고양이의 적절한 이름이 되었다.

 

견디는 법을 아는 고양이

 

파농이 집에 있을 무렵부터, 그리고 지금도 나는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양극성 우울증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우울증보다 우울감이 깊다. 우울증 환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의 반려동물도 우울 증세를 보인다는 데에 있다. 좋아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싫어하는 것도 별로 반응이 없고, 밥이나 간식 등에도 시큰둥하고 무엇보다 그 반짝반짝한 눈을 보기가 어려운, 매일 자거나 가만히 있거나 때로는 자신을 원망이라도 한단 듯이 바라보는 그들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얼마 전 개는 외과 의사, 고양이는 정신과 의사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는데 개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고양이는 영 틀린 말이라고 본다. 고양이는 우리의 정신을 돌보지 않으며 돌봐야 할 의무도 없다. 우리는 피차 적응해서 산다. 파농의 눈에는 내가 조금 침울하고 침체되어 있지만 그래도 몸을 기대고 누이면 마뜩한 존재이다. 나는 그의 아주 아주 작은 것을 무척 무척 온 힘을 다해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맙다. 어떤 집에도 적응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도 적응하고 어떤 밥과 물에도 기꺼이 먹어주는 그의 수더분함은 너무 예민하고 과잉된 초조에 시달리는 나에게 아주 고마운 짝이었다.

 

물론 고양이를 안고 있어도 불면의 밤이 오고, 고양이가 밥을 조르거나 흐르는 물을 달라고 칭얼거려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때가 있다. 그래도 나는 팔배게를 하고 누운 파농의 배를 쓸고 뱃살을 만지고 털을 결방향으로 쓸어주면서 말하지 않아도 파농은 절로 몸을 데운다. 까끌까끌한 혀로 손가락을 쓸다가 잠이 들다가 다시 몸을 털고 일어나 나간다. 고양이를 내 가까이에 두는 것이 익숙해졌듯 고양이도 나를 견디는 법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까다로운데도, 이렇게 어려운 사람인데도, 때로는 진절머리나고 때로는 울적함을 멀리멀리 전염시켜도 그리고 때때로 너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인데도. 파농은 나를 찾아와 함께 잠들고, 내가 자리를 비우고 집에 없으면 울며 찾는다. 기간이 길어지면 털이 부스스해지고 울음소리가 날로 애처로워지는, 밥을 잘 먹지 않거나 계속 밥을 먹거나 하는.

꽉 찬 육키로, 나이는 다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파농은 암컷 고양이치고 꽤 크고 묵직한 편으로 무게가 6-7kg에 육박한다. 하지만 외양은 그보다 날씬한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가족들이나 고양이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얘 개 아니야?” 할 정도로 큰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고양이 주인들의 마음은 ‘실은 우리 고양이가 이렇게 작고 여리고 애기고양이인데...’ 하는 바이다. 늘 파농을 보고 있지만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조고만 고양이! 토끼 고양이!(귀를 뾰족하게 세워주며), 폴드 고양이!(귀를 접으며) 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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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은 얼마 전 내가 가족들과 살게 되면서 지방의 한 고장으로 내려왔는데 특유의 고양이의 아름다움을 뽐내주시며 가족갈등 화합의 선봉을 도맡아 하고 있다. 어머니는 그 많은 놀잇감을 마다하고 고장 난 선물용 리본을 흔들어주면 흥분하는 이 고양이가 절약을 안다며 좋아하시고, 아버지는 먹이 캔을 톡톡 두드릴 때마다 와앙와앙 울며 애교 아닌 애교를 피우는 모습을 흐뭇해하고, 형제들은 따뜻한 제 방 이불위에 고양이가 올라와서 잔다든지 오다다다 도망 놀이를 하며 종일 움직이지 않는 히키인 자신을 달리게 하는 고양이의 품성에 흠뻑 빠졌다. 물론, 놀아주고 재미를 주는 사람들이 다섯 배가 된 만큼 이 고양이가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내 방을 와오와오 배회하며 이상한 것을 갉갉 소리를 내며 바각바각 긁는다든지 침구 주위를 아바바바 뛰어다니다가 풀썩 배 위로 온몸의 무게(육키로)를 실어서 점프를 할 적마다 나는 고얀히 성을 내는 시늉을 하며 고양이 목을 답싹 잡아다가 이불에 처넣고 함께 잠이 드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파농은 일곱 살 정도 되었을 것이며 언제부턴가 별다른 문제가 없더라도 망막질환이 있는 나를 닮아서인지 물체를 보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데 특히 가까이 있는 물체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또 이 고양이는 무슨 성격인지 높은 곳을 올라가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물건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당시에는 착한 고양이~ 라며 추켜세웠지만 이제 고양이 나이도 나이인 만큼 그런 모습을 살면서 보이지 않는 게 이게 무슨 문제가 있나 싶기도 할 정도로. 그러니까 구구절절 말했으나 요지는 착한 고양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말썽을 피우지 않는 것이 걱정이 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고양이도 나도. 그래서 새로운 것을 흡수하고 그에 행동 양태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귀찮지만 너무 다행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이를테면 고양이는 집에 내려오면서 화장실에 세면대로 흐르는 세면기 물을 찹찹 먹는 버릇이 들었는데 거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화장실 앞에 둥지를 틀고 지나가는 모든 만만한 이들에게 와옹와옹 울면서 물을 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이 번거롭지만, 너무나 기쁘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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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의 취미

 

파농은 자기 것이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다른 고양이들이 하듯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특정 장소에 숨겨두거나 자기 마음에 아주 드는 물건이라는 게 없다. 파농은 좀 더 분위기를 사랑하는 고양이이다. 다른 처음 보는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마뜩잖아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오면 공간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내가 기분 좋아한다는 점을 좋아하기 때문에. 파농이 옛날 집에서 의문을 가진 것은 왜 사람들이(나와 동거인) 약 한 시간에 한 번씩, 세탁기가 있는 춥고 조그만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일까- 였다. 물론 우리는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것이지만 담배라는 것을 고양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던 것인지. 게다가 그 작은 창고방에는 파농의 먹이통이 있었기 때문에 고양이의 결론은 “저 녀석들이 내 밥을 먹으러 간다!” 비슷하게 났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문을 들어서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는 갖가지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위야옹위야옹 울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가 나오면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조사하기를 바랐다. 바보 고양이....

 

그랬던 집에서 훨씬 넓은 지금의 집으로 온 파농의 나날은 훨씬 널럴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햇빛이 잘 드는 소파 자리에 앉아서 지그시 바깥 구경을 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발톱 긁개 위에 누워서 소일하다가 집에서 가장 온도가 높은 방으로 걸어 들어가 이불 속에 숨어 잔다. 낮에 사람들이 없을 때 고양이는 그렇게 있고 싶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 꿈도 꾸다가 사람들이 저녁때 오기 시작하면 한 사람씩 맞아준다. 다리에 머리를 비비거나 하면서. 그리고 그즈음에 내가 앉아 자리를 펴고 작업할 준비를 하면 그 위를 곡예 수준으로 돌아다니며(곡예 수준으로 어지럽혀져 있기에) 놀다가 그림을 그리는 내 무릎위로 내려와 보고 있거나 잔다. 몸이 따끈따끈해지면 저리 가서 자! 하며 고양이를 던지지만 일은 반복될 뿐이다. 게다가 파농은 내가 작업 직전에 펼치는 흰 노트의 질감을 좋아해서 그 위에서 몸을 뒤집고 난리가 난다. 그래서 작업을 마칠 때까지 밖에 내놓으면 바깥에서 사람들과 놀다 잘 무렵에 되면 들어온다. 이불 굴을 만들어 유인하고 고양이를 꼭 끌어안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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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게도 여러 유형이 있다. 내 친구들의 고양이들의 면면을 보았을 때 선생님이나 해탈 유형이 있었고 현실적인 말썽쟁이 타입도 있었고, 우울증 고양이도 있었고, 인간화된 고양이나 아니면 고양이 사회화가 가속화되어 인간과 별다른 유대를 만들지 않는 유형도 있었다. 파농은 어떠냐 하면 다분히 인간 중심적 사고이지만 그는 절대적으로 나를 믿는 고양이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밥을 주고 물을 주고 같이 좁은 방에서 살았기에 나오는 것은 아닐 거라 믿는다. 그 고양이는 때로 내가 너무 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자기를 생각할 여력이 없는 믿음직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인 것이다. ‘그래도’인 것이다. 그 고양이가 어째서 나를 신뢰하고 사랑하는지에 대해 나는 의심과 자기 불신투성이 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 사이에 대해서 우리의 유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앞으로 있을 또 다른 새로운 일에 대해 생각하자고 끊임없이 느낄 수 있다. 역시 파농은 좋은 고양이이다. 고양이와 있으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맞는 말이라고 파농이 조용히 답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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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과 보약을 꼭 먹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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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이 무조건 건강에 이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현대인의 생활습관과 식습관을 고려할 때 비타민 결핍증은 피할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비타민제만큼은 챙겨 먹어야 한다.”

 

“아이가 과일이나 채소를 잘 안 먹고, 입이 짧아요. 학교에서 바로 학원으로 가니까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하고… 그러니 비타민과 홍삼정이라도 먹여야 안심이 되죠.”

 

비타민은 건강의 대명사입니다. 음식에 들어있는 미량의 영양소가 부족하면 질병이 생긴다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알려졌습니다. 콜럼버스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지요. 신대륙을 찾아 긴 항해를 하던 중 선원들 사이에 정체불명의 출혈병이 돕니다. 잇몸과 점막에서 멈추지 않고 피가 흐르다 결국 죽고 마는 사람이 늘어나자, 콜럼버스는 병에 걸린 선원들을 작은 섬에 내려놓습니다. 죽더라도 땅 위에서 죽으라는 배려였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섬에 들른 콜럼버스는 깜짝 놀랍니다. 선원들이 아주 건강하게 살아 있었던 거죠. 나중에야 선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출혈병이 비타민 C 결핍증, 즉 괴혈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비타민 C는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과일이나 채소, 우유 등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데 오랜 항해 중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섭취하지 못해 병에 걸린 거죠. 섬에 내려놓은 선원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야생 열매나 과일 같은 걸 따 먹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비타민 C를 섭취하여 괴혈병이 나은 거고요.

 

점차 비타민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밝혀집니다. 비타민 A가 결핍되면 야맹증, 비타민 B1이 부족하면 각기병, 비타민 D는 구루병, 이런 식으로 교과서에도 실렸지요. 비타민vitamin이란 단어 자체가 생명을 뜻하는 vita-와 유기화합물을 뜻하는 -amine이란 말이 결합된 겁니다.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먹을 것이 풍족해지면서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를 제외하고는 비타민 부족증이 거의 없어졌지만 “생명의 화합물”이란 고정관념은 끈질기게 살아남지요. 20세기 들어 비타민의 분자 구조와 합성법이 속속 밝혀지면서 결국 실험실에서 대량합성이 가능해집니다. 비타민 판매가 하나의 산업이 되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비타민을 챙겨 먹게 되었죠.

 

2007년 덴마크에서 비타민에 관한 논문을 메타분석했습니다. 메타분석이란 수많은 논문의 데이터를 모아 재분석하는 방법입니다. 표본 크기가 커지기 때문에 오차가 줄고 검정력이 향상됩니다. 이 연구는 68편의 논문에 포함된 피험자 숫자가 무려 23만 명에 이르러 상당히 신빙성이 있지요. 충격적인 것은 연구 결과 비타민제는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망률을 높였다는 겁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계속 보고됩니다.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비타민이 무조건 건강에 이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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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결핍증이 없는 상태에서 비타민을 복용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까요? 아프리카 등 기아에 시달리는 지역에서는 비타민 결핍으로 실명하거나 사망하는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비타민 결핍증이 있을 때 비타민을 투여해야 한다는 데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의학적으로도 임산부, 만성 소화흡수장애 환자, 채식주의자 등에게는 비타민 보충을 권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 만한, 심지어 비만을 걱정하는 나라에서 따로 비타민제를 먹어야 할까요? 대부분의 의사나 영양학자들은 부정적입니다. 모자라면 보충해줘야 하지만 모자라지 않는데 더 먹는다고 특별한 이익을 보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지만, 이미 밥을 먹어 배가 부른데 또 밥을 먹으면 배탈이 나겠지요?

 

둘째, 비타민제가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비타민과 같은 효과를 발휘할까요? 코펜하겐 연구는 합성비타민제를 통해 섭취하는 비타민이 음식을 통해 섭취하는 것과는 다르며, 건강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 논문을 100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상식과 일치하는 것 같지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영양을 섭취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음식을 눈으로 보고, 입 안에서 맛과 향기와 질감을 느끼고, 배고픔과 포만감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다양한 맛과 색깔과 질감의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는 것 자체가 인생공부예요.

 

합성비타민은 만들기 쉽습니다. 원가는 미미한 수준입니다. 의약품과 달리 규제도 거의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먹어주기만 한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심리를 파고듭니다. 하나는 “완벽”이고, 또 하나는 “불안”입니다. 완벽과 불안은 반대말 같지만 사실 하나입니다. 우리는 항상 바쁩니다.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리죠. 그래서 “불안”합니다. 눈코 뜰새 없이 사는 와중에 온갖 매체를 통해 나와 비슷하게 살던 사람이 어느 날 암에 걸려 허무하게 죽었다든지,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자살했다든지, 겨우 먹고 살게 됐는데 정신 차려보니 아이가 영 비뚤어져 버렸다는지 하는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과 함께 챙길 수 있는 건 모두 챙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완벽”하고 싶은 거죠.

 

비타민 업계는 계속 불안과 완벽을 부추깁니다. “하루 요구량이 얼만데 이걸 채우려면 귤은 40개, 사과는 20알… 너 이거 다 먹을 수 있니? 안 되지? 아침은 대충 때우고, 점심은 햄버거, 저녁은 삼겹살에 소주나 먹잖아… 아이들은 어때? 뭘 먹는 지나 챙겨 봤어? 하지만 걱정 마. 이거 한 알이면 충분하거든….” 이런 식이지요.

 

비타민 업계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세계적으로 연 매출 27조 원, 우리나라도 약 300억~700억 원 규모로 추산합니다. 그 정도 돈이면 못할 일이 있을까요?

 

옆집 엄마는 비타민 젤리도 먹이고, 홍삼 캔디도 먹이고, 짜먹는 녹용도 먹여요. 다들 하는데 나만 하지 않자니 불안합니다. 이럴 때 중심을 잡으려면 현명함과 용기가 필요하죠. 진실을 파악하는 요령은 아주 간단합니다. 뭔가를 파는 쪽, 이익을 보는 쪽의 말을 훨씬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신문이든 TV든 뭔가를 사지 말라고, 어떤 치료를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일단 옳다고 믿으세요. 적어도 어떤 이익을 노리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혹시라도 비타민을, 홍삼을, 녹용을 먹이지 않아 우리 아이가 뭔가 손해를 보면 어쩌죠? 걱정 마세요. 그것 하나로 세상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덕분에 그런 사소한 일에 시시콜콜 신경을 쓰지 않는 대범함과 느긋한 태도를 배웠다고 생각합시다.

 

‘완벽’하다는 건 뭘까요? 완벽한 식단을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요? ‘완벽’이라는 추상적인 목표를 정해두고 ‘당신은 이게 부족하고, 이것도 필요하고…’ 식으로 따진다면 비타민제가 필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비타민뿐입니까? 산삼도 필요하고 녹용도 필요하지요.

 

저는 엄마들에게 비타민을 먹일 정성으로 이것저것 다양한 식품을 먹여보고, 균형 잡힌 식단을 고민해보라고 권합니다. 이유기의 아이라면 이런 노력을 통해 편식하지 않는 습관을 들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큰 아이라면 시장에도 데려가고, 먹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르게도 해보세요. 요리할 때 참여시키는 것도 편식을 바로잡는 데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손으로 고른 것,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은 먹고 싶어하거든요.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편리하게 비타민제를 먹이면서 엄마 스스로 마음을 놓고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려면,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면 관심과 노력과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관심을 기울일 시간을 아껴 성공에 쏟아 붓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사람을 돈으로 키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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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도 오지 않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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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씨는 눈을 뜨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디지털시계가 여섯 시 이십오 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와 분을 나타내는 숫자 사이의 쌍점이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네 시쯤 시계를 본 뒤엔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두 시간 쯤은 잔 셈이다.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눈꺼풀은 무거운데 최영호 씨의 바람과는 달리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잠을 더 자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직원 퇴근 시간인 여덟 시에 맞추려면 지금 일어나야 했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의 칼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시계가 규칙적인 기계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최영호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알람을 껐다. 매번 뒤늦게 울리는 시계는 주인을 깨우는 본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어깨가 뻐근했다. 전날 재고를 정리하며 상품을 옮기느라 안쓰던 근육에 힘을 쓴 탓인 것 같았다. 최영호 씨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어깨를 주무르며 애꿎은 시계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개업식 날 선물로 들어온 납작한 상자 모양의 나무 색깔 시계는 요즘 추세에 맞게 라디오와 블루투스 스피커 역할까지 할 수 있는 다용도 제품이었다. 상판에는 개업식 날짜와 함께 “화니프라자 번영회 회원 일동”이라는 검정색 궁서체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최영호 씨가 편의점을 차린 것은 일 년 반 전이었다. 십오 년을 다닌 회사를 그만두는 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재취업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퇴직금 오천만 원으로 가능한 선택지 역시 많지 않았다. 자영업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고 퇴직 후 식당이나 술집 등을 차렸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가게를 접는 지인들도 종종 보았던 터였다. 택배 기사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도 택배 박스를 내려놓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그들을 떠올리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일피일하다 한 달이 훌쩍 지났고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문득 편의점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어느 날 담배를 사기 위해 집 근처 단골 편의점에 들렀을 때였다.

 

일단 결정하고 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안정적인 수입을 낼 수 있을 겁니다.” 본사의 가맹 상담 직원은 자신 있는 말투로 ‘안정적’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편의점을 내기 위해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퇴직금만큼의 돈이 필요했고, 최영호 씨는 왜 길거리에 편의점이 이렇게 많아졌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업이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은 거의 바닥나 있었다. 통장에 찍힌 숫자를 확인할 때면 허무함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빚 없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편의점을 찾는 손님은 꽤 많았다. 두 달이 지난 뒤엔 단골도 제법 생겼다. 물건은 꾸준히 팔렸고 매출도 늘었지만 수입은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본사에 내야 하는 수수료 외에 임대료, 아르바이트 직원의 인건비 등 고정비용을 제외하면 월말에 통장에 남는 돈은 삼백 만 원이 채 안 되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세 달 째부터는 야간에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을 한 명 줄였다. 대신 일주일에 이틀은 최영호 씨가 야간에도 매장을 지켜야 했다. 밤샘 근무 다음 날 아침은 아내에게 매장을 맡겼다가 오후 세 시쯤 다시 출근했다. 밤새 몰려오는 졸음을 쫓으며 만 하루의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면 몸은 파김치가 되었지만 막상 오랜 시간 잠을 이루진 못했다. 그래도 다시 편의점에 나가 일을 하려면 수면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침실의 두꺼운 커튼을 닫고 침대에 올라가 수면 안대와 귀마개를 착용한 뒤 돌진하듯 잠을 청하곤 했다.

 

월말 통장 잔고는 이전보다 늘었지만 최영호 씨의 다크서클은 심해졌다. 원래 작은 체형인데다가 체중이 오 킬로그램이나 줄어 비쩍 마른 몸이 되었다. 보다 못한 아내의 권유로 병원을 찾은 게 삼 개월 전이었고, 의사는 그에게 당뇨병 진단을 내렸다. 최영호 씨는 고민 끝에 다시 야간 아르바이트 직원을 늘리기로 했다. 당뇨병이 올 정도로 나빠진 건강이 밤새 일하는 걸 버텨주긴 힘들 것 같았다. 매일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하고 저녁 여섯 시에 퇴근하는 규칙적인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었다. 수입은 다시 줄어들겠지만 밤낮이 바뀌어 생체 리듬이 뒤죽박죽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최영호 씨는 퇴근 후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이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불면증이 심해진 것은 야간 근무를 그만둔 이후부터였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면 금방이라도 졸음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학원에서 돌아올 아이들과 얼굴이라도 맞대려면 피곤함을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에 침대에 눕는 순간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숙면에 좋다는 따뜻한 우유도 마셔보고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재미없는 책도 읽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뇨병 진단을 받은 뒤엔 밤 아홉 시쯤 나가 삼십 분쯤 속보로 걷곤 했는데, 몸이 피곤해지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운동장을 뛰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뜀박질한 날에도 불면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옆에 누운 아내의 숨소리를 들으며 침대 안에서 뒤척거리다 보면 매번 새벽 한두 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케이블 심야 영화 채널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취침과 기상 시간이 자로 잰 듯 일정했다. 열한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어디서든 베개에 머리를 대면 금새 잠이 들었고 중간에 깨는 일도 없었다. 불면증으로 병원에 다닌다는 동료들의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긴 퇴직을 하기 전엔 내 사업을 한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건지도 미처 몰랐었다. 다음 달엔 근처에 편의점이 하나 더 생긴다고 했다. 고만고만한 규모의 비슷한 매장이라 매출에 타격을 입을 것은 뻔했다. 내년부턴 최저임금이 오른다고 하는데 늘어날 인건비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도 걱정이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했지만 그 부담을 자신과 같은 영세 업주가 모두 지게 되는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본사 수수료와 매년 꼬박꼬박 오르는 건물 임대료도 원망스러웠다. 불면증이 심해진 건 어쩌면 스트레스 때문인지도 몰랐다.

 

“혈당이 지난 달보다 올랐네요. 약은 잘 드신 것 같은데, 그동안 다른 변화가 있었나요?”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던 의사의 질문에 최영호 씨는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뇨병을 진단받은 뒤론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건물 3층의 반딧불 의원을 찾고 있었다. 치료를 시작하고 지난번까진 혈당 수치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빠졌던 체중도 절반 정도는 회복한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 검사 결과는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아뇨. 큰 변화는 없었어요.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단지… 요즘 잠을 통 못 자서 피곤해요.”


“야간 근무는 그만두셨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당뇨병이 생긴 뒤부턴 밤일은 안해요. 그런데도 그 뒤로 잠은 더 못 자니 미칠 노릇입니다.”


“보통 몇 시쯤 주무십니까.”


“열한 시요. 그런데 매번 한 시, 두 시가 넘어야 잠이 들어요. 중간에 깨는 경우도 많구요. 아침 여섯 시 반엔 일어나야 제시간에 출근을 합니다. 네 시간쯤 자면 많이 자는 날이에요. 몸은 피곤한데 밤에는 머리가 말똥말똥해지고, 일을 해야하는 낮에는 오히려 머리가 멍하고 졸음이 와서 커피라도 찐하게 마셔야 버틸 수 있어요.”


“침대에서 잠이 안 오면 어떻게 하시나요?”


“방법이 있나요. 뒤척뒤척하는 거죠. 잠이 안 올 때 침대에 오래 누워 있는 것도 불면증엔 안 좋다고 해서 요즘은 거실에 나가서 티비를 봐요. 그러다 운 좋게 소파에서 잠이 들기도 합니다.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게 좋다고 해서 그렇게도 해봤어요. 대추차나 허브차도 마셔봤습니다. 밤에 격한 운동을 해서 일부러 몸을 피곤하게도 해봤고요. 그런데 효과가 전혀 없었어요.”

 

최영호 씨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새 눈 밑 다크서클이 손가락 한 마디 쯤은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불면증이 생기기 전에는 잠을 못 잔다는 게 이렇게 괴로운 건지 몰랐습니다. 해가 기울어가면 밤이 되는 게 무섭습니다. 몇 시간 동안 침대에서 뒤척일 생각을 하면 괴롭기만 해요. 원장님,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요?”


“못 먹어서 죽는 사람은 있지만 못 자서 죽는 사람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의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심각한 환자를 앞에 두고 농담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의사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잠 못 자는 걸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데 잠을 못 잔 날은 다음 날 몸이 너무 힘들어요. 얼마 전엔 카운터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손님이 들어와 계산 안 한 물건을 그냥 가지고 나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어떻게든 밤에 잠을 자야 이런 일이 안 생기죠.”


“잠을 자려고 애쓸수록 잠은 달아나기 마련입니다. 잠 못 자고 출근하면 피곤하고 힘들 텐데 하는 마음부터 버리고 그냥 누워서 눈 감고 쉰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다 보면 또 잠깐 잠들 수도 있죠.”

 

최영호 씨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천천히 끔뻑거렸다. 의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저도 늘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눕습니다. 저는 최 사장님보다 더 늦게 자거든요.”

 

그는 이곳이 밤에만 여는 병원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앞에 있는 까칠한 얼굴의 의사도 잠을 푹 잘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수면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대신 오래 쓰진 않을 거예요. 원래의 수면 리듬을 찾으면 줄여보도록 하지요. 다음 날 어지럽거나 졸림이 심하면 다음에 오셨을 때 알려주세요.”


“그래 까짓것, 잠 못 자서 죽는 사람 없고 잠 못 자면 다음 날 너무 힘들겠지만 어쩔 수 없지, 오늘 밤엔 이렇게 생각해보죠, 뭐.”

 

체념한 듯 고분고분한 말투로 대답하는 최영호 씨에게 의사는 한마디 더 당부했다.

 

“점심 먹은 뒤부턴 커피는 절대 드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낮에 손님 없을 때는 가게 안에만 계시지 말고 앞에 나가서 햇볕 쬐세요. 햇볕은 최고의 수면제이거든요.”

 

 

“잠을 못 잔 지 십칠 일째다”’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잠>은 악몽을 꾼 후 심각한 불면증이 생긴 가정주부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밤마다 러시아 고전을 읽고 드라이브를 즐기며 자신만의 시간을 향유한다.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은 불면증으로 새로운 인생을 열었지만 현실에서 불면증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괴로운 문제다. 불면증은 모든 수면장애 가운데 발생 빈도가 가장 높은 질환으로, 일반인 가운데 약 1/3 정도가 불면 증상을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선 성인 5,000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조사 결과, 응답자의 22.8퍼센트가 불면증을 겪었으며 14.9퍼센트가 일주일에 2회 이상 불면증을 겪는다고 답했다. *

 

불면증은 심한 스트레스와 같은 유발 인자에 노출될 때 흔히 생길 수 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거나 실연, 가족의 사망 등을 겪은 직후 일시적으로 잠이 안 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원인이 되었던 사건이 해결되거나 시간이 지나면 불면증도 좋아지지만, 수면장애에 취약한 유전적 요인, 잘못된 수면 습관, 불규칙한 수면 스케줄 등으로 인해 만성화될 수 있다. 또한 불면에 대한 걱정으로 지나친 각성 상태가 되는 것, 잠을 더 자기 위한 방어 행동(잠이 안 와도 누워 있는 것, 더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 등)도 만성 불면증의 원인이 된다.

 

수면제는 망가진 수면 패턴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정해 짧게 복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흔히 쓰는 졸피뎀(zolpidem) 성분을 비롯한 모든 수면제는 장기 복용 시 의존이 생길 수 있으므로 주의해 사용해야 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적절한 인지행동요법이 수면제만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대표적인 것이 자극조절치료다. (1) 졸릴 때만 잠자리로 가라, (2) 잠이 안 올 경우 침대에서 나와 다른 방으로 가고 잠이 바로 올 것 같은 경우에만 침대로 돌아가라, (3) 침대에선 수면에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을 피하라(텔레비전이나 휴대폰을 보지 말 것, 일을 하거나 문제 해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등), (4) 전날 밤의 수면 양에 상관없이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라, (5) 낮잠을 피하라 등이 주된 내용이다.

 

인지행동요법이 효과를 나타내려면 대개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꾸준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 수면 위생도 중요하다. 늦은 시간의 흡연이나 카페인 섭취를 피하는 것이 그 예다. 그 외에도 낮 시간의 적절한 운동은 수면 유도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잠자기 직전의 과도한 운동은 오히려 각성 상태를 일으켜 불면증을 악화시킬 수 있다.

 

* Cho YW, Shin WC, Yun CH, Hong SB, Kim J, Earley CJ, Epidemiology of insomnia in korean adults: prevalence and associated factors, J Clin Neurol, 2009 Mar; 5(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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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 긍정, 또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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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랏엔 뭐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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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현지인들의 달랏 여행법은 ‘쿨내 나는 카페 투어’


 

달랏은 별종 같다. 베트남인 건 맞는데 베트남이 아닌 것 같다. 호찌민에서 슬리핑버스(1, 2층좌석이 나뉜 버스로 다리를 쭉 펴고 누워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달랏에 도착했다. 야자수가 침엽수인 소나무와 전나무로 바뀌었다. 같은 나라 안에서 지역을 이동했을 뿐인데 기후대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소나무숲이 만들어 낸 상쾌한 공기와 1500m의 고도가 달랏을 365일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게 했다.

 

“여기, 치앙마이 같지 않아?”


달랏에 도착한 후 우리의 첫 번째 반응이었다. 겨울임에도 따뜻한 햇살, 저렴한 물가, 내륙도시, 풍부한 농수산물, 느긋한 미소 등 태국의 치앙마이와 여러모로 닮았다. 호찌민의 표정 없는 상인들, 오토바이의 신경질적인 경적에 지쳐 있던 우리는 도착한지 하루도 안돼 달랏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 얼굴이 베트남 사람 같다며 친근하게 베트남어로 인사한다. 내가 '씨익' 웃으면 상대방도 웃음으로 화답을 해준다. 겨울이면 물가가 오르고 방 구하기 힘든 치앙마이 말고 이제 달랏이면 되겠다.

 

이곳은 우리 같은 여행자뿐 아니라 현지인에게 사랑받는 도시다. 작년 한 해, 달랏을 찾은 관광객 수는 500만 명. 이 중 95%가 베트남 현지인이다. 그리고 나머지 5%에는 한국, 중국, 태국, 러시아인이 조금씩 지분을 나눠 갖는다. 비교를 위해 다낭을 살펴보면 비슷한 수의 관광객 중 50%만이 현지인이다. 수치로 본 현지인의 달랏 사랑이다.

 

그러나 현지인보다 먼저 이곳의 매력을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식민지시절일찌감치 달랏을 휴양지로 점 찍으며 기어코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어냈다. ‘달랏와인’은 도시의 이름을 상표로 내걸고 베트남 유일의 포도주 생산지가 되었다. 우리 돈 5,000원이면 마트에서 달랏와인을 맛 볼 수 있는데 특별한 매력이 있는 건 아니나 와인 맛을 내려고 노력한 프랑스인의 근성에 감탄하게 된다.

 

와인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커피의 주요 생산지가 이곳, 달랏이다. 참으로 부지런히 많은 걸 생산해내는 도시다. '날씨 좋고 재정까지 풍족하니 사람들 표정이 부드러운 걸까?' 도시와 관련된 온갖 상상이 펼쳐진다. 커피와 관련된 관광인프라도 부족함이 없다. 현지인들은 카페 투어, 외국인들은 커피농장지투어 등 커피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있다. 달랏카페는 인테리어, 전망, 커피맛, 가격까지 한국의 내로라하는 카페 못지않은 장점을 가졌다. 달랏은 커피 애호가들의 마음을 훔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여러분, 달랏으로 오세요'라고 현혹하는 듯한 말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그남자와 내가 달랏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뛰고 너는 못 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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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니어닝, 짚라인 등 자연과 어울리는 액티비티가 사람들을 이끈다


 

그 여자가 달랏에 가자고 하면서 꺼낸 말이 기가 막히다. 겨울에도 꽃이 피는 온화한 기후라서가 아니고, 베트남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캐니어닝은 스위스와 베트남 달랏에서 밖에 할 수 없대. 물가 비싼 알프스에 가서 그거 할 수 있겠어? 나 진짜 캐니어닝이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저렴한 달랏에서 해보자 이거지!”

 

그 여자는 몸도 잘 쓸 줄 모르면서 격한 움직임을 좋아한다. 격투기 선수의 파괴적인 주먹질에 감탄하고, 스턴트맨의 위험한 연기에 물개 박수를 친다. 아마도 자신은 몸이 따라주지 않아 할 수 없기에 그 어렵고 버거운 움직임을 동경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유인지 여행지에서 액티비티 활동을 할 수 있다면 몸이 움찔움찔한다. 그러고는 나를 꼬시기 시작한다. 해 보고 싶은데 혼자서는 할 용기가 나지 않으니 나를 핑계 삼는 거겠지.

 

계곡에서 밧줄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액티비티를 스위스 어딘가와 베트남 달랏 두 군데서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은 애초에 믿지 않았다. 하지만 군말 없이 믿고 따라 온 것은 올 한 해 동안 지켜보자고 약속한‘ 긍정’이란 단어 때문이다. ‘긍정, 긍정, 또 긍정’이 2018년 나의 좌우명 되시겠다.(궁금할지 모르니 그여자의 올해 좌우명은 ‘다정, 다정, 또 다정’ 되시겠다. 쌀쌀맞은 그 성격 고쳐보라고 내가 제안한 거다)

 

매사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이다. 가까운 사람마저도 믿지 못하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좋은 점이면 죽을 때까지 가져가도 좋겠지만 이런 성격은 더 늙기 전에 고쳐보고 싶다. 그래서 올 한 해는 매사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여자가 마침 캐니어닝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나도 평소에 하지 않는 일로 새해의 다짐을 이어가고 싶기도 했고.

 

이른 새벽 15인승 승합차에 제일 먼저 올랐다. 예약자들을 호텔마다 픽업하는 차 안에 앉아‘ 얼마나 다양한 나라에서 모인 여행자들과 함께 이 험한 놀이를 하게 될까?’ 궁금했다. 승합차에는 놀랍게도 9명의 한국인이 올라탔다. 한글만 가득한 승합차 안에서 가이드만 영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오늘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난 네가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힘들면 못하겠다고 해!”

 

시작하기도 전에 그 여자는 내가 걱정된다며 안절부절못한다. 가끔 보면 그 여자는 나와 사이가 너무 가까워서 내가 본인보다 육체적 능력이 낫다는 점을 잊곤 한다. 거기뿐이면 괜찮은데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엄마 같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줄 잡고 벽을 타고 내리는 훈련을 받아 봤는데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다. 첫 번째 계곡부터 작은 폭포를 따라 내려간다. 시작하자마자 그 여자의 손가락은 물에 젖은 밧줄에 밀려 찢기고 쓸려 깊은 상처가 생겼다. 도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폭포 위를 줄을 타고 내려오기도 하고, 급류에서 미끄럼틀도 타면서 반나절을 계곡을 따라 움직였다. 힘이 들긴 하지만 이 정도는 할 만한 액티비티라고 생각했다. 그 마지막을 보기 전에는. 마지막 코스는 10m 높이의 바위에서 폭포 속으로 시원하게 다이빙하기였다. 10m 우습게 보지 마시라. 나 같은 쫄보에게는 천 길 낭떠러지처럼 보인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여기서 뛰어내려야 한단 말인가!


마침 가이드는 나를 꼭 집어서 제일 먼저 해보라고 부추겼다. 그와 친구 하자며 말을 트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안 뛰면 그 여자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못 뛸 거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 걱정보다는 올해는 좀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고 싶은 내 욕심이 먼저였다. 그렇게 캐니어닝을 예찬했던 그 여자는 결국 못 뛰었지만 나는 뛰었다. ‘긍정, 긍정, 또 긍정’을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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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베개를 베고 자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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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작고 약했다. 죽을까봐 무서웠다. 개와 함께 산다는 것은 언제라도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인데, 어쩌면 그 슬픔은 내가 이 작은 개를 가장 사랑하고 있을 때 찾아올 것 같았다. 내게 사랑은 그런 거였다. 나의 연약함을 정면으로 조준하는 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 한동안은 쉽게 만지지도 못했다. 눈곱을 떼어주려다 눈을 다치게 할 것 같았고, 목욕을 시키다가 귀나 코에 물이 들어가서 죽을 것 같았다. 호두의 어린 시절 사진이 죄 꼬질꼬질한 것은 이런 이유이다. 모르겠다. 그냥 자꾸 죽어버릴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병아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유 없이 죽을 것 같았다. 이유가 있지만 내가 눈치를 못 채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잠든 사이에 강아지가 죽을까 봐 며칠 동안 거의 잠을 못 잤다. 잠든 강아지가 깽깽거리는 소리라도 내면 눈이 벌게져서 검색을 하고 또 했다(잠꼬대였다). 이름은 오직 그런 바람으로 지었다. 꼭 단단해져라, 호두알처럼. 호두는 이름처럼 단단하고 꿋꿋한 강아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처음 느꼈던 조급한 비애가 우습다고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사이는 유쾌하고 충만하다. 호두와 함께 사는 일 어디에도 슬프고 두려운 구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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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알게 된 많은 것 중 내 삶을 가장 크게 흔든 것은, 이 땅의 동물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연히 지구에 인간만 산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동차 밑에 고양이들이 엎드려있고, 누더기 개가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고, 동물원엔 각종 동물이, 그저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것은 정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두와 생활을 함께하며 알게 되었다. 동물은 감정이 참 다양하다. 슬픔을 알고 허전함을 느끼고 신이 나고 즐겁고 장난을 꾸미고 불안하고 분노하고 위로한다. 이보다 많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동물의 정서적 풍요로움을 알게 된 이후로 동물은 그저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자동차 밑의 고양이는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숨긴 것이며 제 삶터를 잃은 것이다. 도시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그랬다. 더러운 몰골의 누더기 개도 그냥 거기 있는 게 아니었다. 호두가 알려준 이 엄청난 사실 때문에 내 인생에 슬픈 순간이 더 자주 찾아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생태 공감 능력이 바닥이던 바보가 하나 줄어든 것도 틀림없다. 그러면 이제 호두가 얼마나 놀라운 강아지인지 설명할 차례인가. 아니, 동물이 얼마나 섬세한 정서를 가진 존재인지 말할 차례인가. 둘은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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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짜 강아지는 이상한 식사법을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밑반찬을 바꾸는 것으로라도 섭식 생활의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간과는 달리, 개들은 그럴 처지가 못 된다. 늘 같은 식감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사료만 먹는다. 그래서 호두는 나름의 식문화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먼저 사료를 한 알 물어다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방석 위에 올려놓는다. 그 후 밥그릇으로 가 나머지를 먹는다. 방석 위에 올려둔 마지막 한 알은 모든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최대한 오래 냄새를 맡고 들여다본 후 천천히 먹는다. 마지막 한 알의 사료가 디저트인 것일까. 사료 한 그릇 안에서도 코스를 만들어내는 대단한 강아지가 아닐 수 없다. 가끔은 사료를 한입 물어다가 텔레비전 앞에 뱉어놓을 때도 있다. 접시에 코 박는 허겁지겁 식사는 하지 않겠다는 거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사료를 조금씩 깨물어 먹는다. 화면 속의 인간들이 뭐라고 지껄이는지는 관심 없지만, 시시각각 모양이 변하는 네모난 화면을 본다. 좀 짓궂은 취미도 있다. 마감에 정신이 팔려 방문을 닫고 있으면, 호두가 방문을 긁고 난리다. 열어달라는 거다. 쉬었다가 할 겸 좀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면,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다. 닫으면 다시 반복. 한창 ‘벨튀(벨 누르고 튀기)’가 재미있을 나이라고는 해도 좀 너무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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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의 분량상 전부 다 말할 수 없지만 동물과 함께 사는 일상의 다채로움과 그 경이는, 동물을 그냥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안다. 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부르고, 동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아파할 수밖에 없는지를. 표정만 보아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보이고, 몸짓만 보아도 원하는 것이 들리기 때문이다. 표정과 몸짓이 말이 되기 때문이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한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일 테다. 두 발을 붙이고 사는 것과 네 발을 붙이고 사는 것의 차이만큼의 크고 작은 차이를 제외하면,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작은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는 같다. 내가 사람인 것을 빼면 호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작고 무른 강아지가 차돌처럼 단단해지기를 바라면서 호두라고 불렀다. 그런데 단단해진 것은 오히려 내 쪽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가장 연약한 곳으로 흐르는 마음이 나를 씩씩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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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 젠더와 섹스에 대해 아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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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방송 EBS에서 <까칠남녀>라는 프로를 통해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후유증이 만만치 않습니다. 학부모들이 방송국 로비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인터넷에 비난이 빗발치고, 청와대에 프로그램을 폐지하라는 청원까지 넣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인간의 성(性)에 대해 어떤 규범에 비춰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성소수자를 포용해야 할 의사들조차 동성애에 대해 거의 율법적 태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생물학, 유전학, 의학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요. 성이 인간을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만큼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개념들이 어렵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시각을 어느 정도 수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동물이기 때문에 낯선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거든요. 따라서 무엇보다 열린 마음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글은 과학이 인간의 성에 대해 밝혀내고 있는 것들을 알리기 위해 쓴 것이며 곧 단행본으로 출간됩니다. 알마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조금 줄여 싣습니다. 이 분야에 대한 글들이 대개 어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복잡한 설명은 피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고자 하지만 3-4회 정도는 연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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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에 대해 이해할 때 먼저 4가지 기본 영역을 알아야 합니다.


1)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


일단 성(性)이 뭐냐는 질문에 답해야겠지요. 누구나 알듯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합니다. 이 구분에는 출생 시 해부학적 특징, 즉 성기의 모양과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사춘기에 나타나는 2차 성징, 즉 남성은 수염이 나고, 목소리가 낮아지고, 근육이 발달하는데, 여성은 가슴이 나오고, 골반이 커지고,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특징으로도 구분하지요. 이런 특징들은 유전자에 의해 정해집니다. 인간의 염색체는 46개입니다. 44개는 상염색체(보통염색체)이고, 2개는 성을 결정하는 성염색체입니다. 성염색체가 XX면 여성, XY면 남성이 됩니다. 하지만 염색체(유전자)는 설계도일 뿐입니다. 설계도에 따라 몸을 만드는 것은 호르몬의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남성호르몬에 반응하지 않는 희귀한 질환을 타고난 사람은 XY 염색체를 지니고 있지만 외형상 여성이 됩니다. 이렇게 유전자나 호르몬에 의해 정해지는 성별을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이라고 합니다. 한편 염색체나 호르몬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생물학적으로 성별 구분이 모호해지는 수가 있는데 이를 간성(間性, intersex)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남녀한몸증(hermaphroditism)이라고 했는데 부정확하고 차별적인 용어라고 하여 현재는 잘 쓰지 않습니다.

 

2) 성적 정체성(Gender Identity)


그런데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자신의 성별을 생물학적 성별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여자아이인데 자기는 남성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느끼는 성별을 성적 정체성(gender identity)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여자아이는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며, 남자아이는 자신을 남성이라고 느낍니다.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는 거죠. 이런 경우를 시스젠더(cis-gender)라고 합니다. 반대로 여자아이가 자신을 남성이라고 느끼거나, 남자아이가 자신을 여성이라고 느끼는 경우, 즉.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고 합니다. 왜 자꾸 ‘아이’라고 하느냐고요? 성적 정체성이 비교적 이른 나이인 3-4세 경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잠깐 용어를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말로는 그냥 ‘성(性)’이라고 하지만 영어로는 sex와 gender를 구분해서 씁니다. 보통 sex는 생물학적인 성을 가리키거나 성적 행위와 연관된 것들을 지칭할 때 씁니다. 한편, gender는 성적 정체성이나 사회적 역할을 얘기할 때 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논의가 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어를 확립하든지, 새로운 용어를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페미니즘, 젠더라는 용어를 그냥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지만, 거꾸로 사고를 규정하기도 하니까요.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트랜스젠더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여성이었다가 수술을 받고 외모나 신체 구조상 남성이 된 사람, 또는 반대의 경우를 트랜스젠더라고 하지만 사실은 틀린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스(cis-)와 트랜스(trans-)라는 접두사는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뜻은 각각 ‘이쪽’과 ‘건너 쪽’입니다. 주로 유기화합물의 구조를 지칭할 때 쓰였는데 최근 성적 정체성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빌려온 겁니다. 그러니까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같은 쪽에 있으면 시스, 반대쪽에 있으면 트랜스입니다. 그럼 신체 구조가 바뀐 사람은 뭐라고 할까요? 트랜스젠더 중에는 그대로 있어도, 즉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남성의 몸을 갖고 있어도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외모나 신체를 갖고 싶어하지요. 그래서 호르몬 치료나 수술을 받습니다. 그 과정은 전환(transitio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의학적인 방법으로 신체 구조가 바뀐 사람은 성전환자라고 합니다.

 

3) 성적 표현(Gender Expression)

 

성적 표현(gender expression)이란 옷이나 장신구, 행동, 언어 등 외관상 나타나는 젠더에 관련된 특징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가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쌍절곤을 휘두른다거나, 남자아이가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는다거나 하면 생물학적 성과 성적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성적(feminine)과 남성적(masculine)으로 구분하는데 역시 중간 형태가 있겠지요? 그건 중성적(androgynous)라고 합니다. 어떤 복장, 어떤 행동을 여성적 또는 남성적이라고 볼 것인지는 지역과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치마를 입는 것을 여성적인 특징으로 생각하지만 스코틀랜드처럼 남성이 전통적으로 치마를 입는 곳도 있지요. 보통 여성이 남성적 행동을 하는 건 ‘선머슴’ 같다며 다소 너그럽게 받아들이지만, 남성이 여성적 행동을 하면 ‘기생오라비’ 같다고 해서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릴 적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인 여성이 남성용 정장을 입고 다니거나, 성인 남성이 머리를 길게 기르고, 화장을 하고, 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다닌다면 이상한 눈초리를 받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4)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


영어로 gender라고 하지 않고 sex란 용어를 썼지요? 성적 행위와 관련된 주제란 뜻입니다. 동성애 얘기가 바로 여기서 나옵니다. 생물학적 성이 어떻든, 성적 정체성이 어떻든 대개 사춘기가 되면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게 됩니다. 이걸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라고 합니다. 대부분 이성을 사랑하게 되지만, 동성에게 끌리는 경우도 있지요. 각각 이성애자(heterosexual), 동성애자(heterosexual)라고 합니다. 남성 동성애자를 게이(gay), 여성 동성애자를 레즈비언(lesbian)이라고 하는 건 많이 알려져 있지요? 한편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끌리는 경우는 양성애자(bisexual), 어느 쪽에도 끌리지 않는 경우는 무성애자(asexual)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LGBT(Q)라는 약자도 많이 씁니다.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queer’의 머릿글자를 딴 말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란 뜻입니다. 써놓고 보니 너무 많은 용어가 한글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네요. 퀴어란 단어는 나중에 설명할게요.


생물학적 성, 성적 정체성, 성적 표현, 성적 지향이 모두 이해가 되시나요? 이제 정말 중요한 점을 살펴봅시다. 각 영역들은 독립적이란 겁니다. 연결시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떤 영역끼리도 서로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자신은 남성이라고 느낀다면 일단 트랜스젠더지요? 이 사람은 자라서 남성을 사랑할 수도 있고, 여성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별개니까요. 4가지 기본 영역마다 여성과 남성이 존재하니까 2x2x2x2=16가지 유형이 나오겠지요. 중간도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간성이거나, 성적 표현이 중성적이거나, 성적 지향이 양성애자 또는 무성애자인 경우 말입니다. 그러니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여성적으로 꾸미고 다니길 좋아하고, 말도 행동도 얌전해서 어려서는 어딜 가든 사람들이 여자아이인 줄 알았습니다. 성장해서도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성스런’ 귀걸이를 하고, 립스틱을 비롯한 색조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고 다닙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남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생물학적으로는 남성, 성적 정체성도 남성, 성적 표현은 여성인 셈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남성을 사랑하게 될까요, 여성을 사랑하게 될까요? 모릅니다. 성적 지향은 독립적이므로 연결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는 이성애자로 여성과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사는 분도 있고, 동성애자로 남성과 파트너가 되어 사는 분도 있습니다.

 

가장 혼동하기 쉬운 것이 성적 정체성과 성적 지향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자신은 남성이라고 인식한 결과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동성애자(레즈비언)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 정체성은 자신에 관한 인식입니다. 대개 아주 일찍 생겨납니다. 3세 전후로 생긴다고 하는데, 18개월부터 성적 정체성을 강하게 인식했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성적 지향은 사춘기 들어, 사랑에 빠지는 나이에 생깁니다. 트랜스젠더인지 시스젠더인지는 아주 어려서부터 알 수 있지만,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는 사춘기가 되어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살배기가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젠더’를 ‘섹스(정확하게는 섹슈얼리티)와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세 살배기가 트랜스젠더라는 말은 ‘자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보세요. 세 살이나 됐는데 자기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는 아이도 있나요? (다음 회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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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담배를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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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사장님, 아직도 담배 안 끊으셨나 봐요.”

 

데스크 앞을 지나치는 환자에게 김희정 씨가 부드럽게 말했다. 깡마른 얼굴의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 네…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끊으려 생각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네요.”


“꼭 끊으셨으면 좋겠어요. 원장님도 여러 번 말씀하셨잖아요.”


“그, 그렇죠. 당뇨병도 있으니 끊긴 끊어야 하는데….”


“새해도 되니 다시 한 번 계획을 꼭 세워보세요.”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선생님처럼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간호조무사 앞에서 스무 살은 더 먹었을 듯한 남자는 쩔쩔매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가 옆자리에 앉는 순간 김형철 씨는 얼굴을 찌푸렸다. 막 담배를 피운 뒤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예전이라면 다른 사람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를 느끼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도 금연을 하고 나서야 담배 냄새가 그렇게 강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구수하기만 했던 향기가 역하게 느껴진 것은 금연을 하고 한 달쯤 지난 다음이었다. 함께 담배를 피우던 동료와 마주앉아 회의를 할 때면 그에게서 풍기는 재떨이 냄새에 불쾌감을 느껴야 했다. 그동안 자신이 가까이 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냄새를 참았을 거란 생각에 김형철 씨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나한테서 나는 담배 냄새를 어떻게 참았어?”

 

김형철 씨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은 금연을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아내는 새삼스럽다는 듯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이십 년이 넘었으니 포기하고 살았지 뭐. 당신이 담배를 끊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이제야 말하지만 그 냄새 때문에 당신하고 각방 쓸까 생각했던 적이 족히 수십 번은 될 거야.”

 

김형철 씨는 다시 담배를 피웠던 날을 떠올렸다. 유월에 끊고 십이월쯤 되었을 때니 거의 육 개월이 될 무렵이었다. 한 해 실적을 결산하는 연말은 직장인들이 압박감을 심하게 느끼는 시기였고, 김형철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갈수록 엄격해지는 연말 인사 평가를 위한 업무 능력 시험을 앞둔 직원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실적 악화로 본사 직원을 인건비 대비 십 퍼센트 감축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내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흡연 공간에 모인 부하 직원들은 전날 밤 회식 뒤끝의 숙취가 깨지 않은 부석부석한 얼굴로 숙덕이다 김형철 씨가 다가가면 황급히 흩어지곤 했다.

 

그날은 하반기 사업 결산 보고를 앞두고 하루 종일 긴장했던 차였다. 늦은 저녁 식사 때 폭탄주 몇 잔을 마시고 취한 것이 화근이었다. 숙취 해소 음료를 사려고 들른 편의점에서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담배 한 갑이 들려 있었고 다음 날 아침에 두통을 느끼며 잠을 깼을 땐 이미 그 절반이 사라진 뒤였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스트레스가 많은 연말까진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새해가 되면 어떻게든 다시 담배를 끊어야 했다. 지난번처럼 병원에서 금연 약을 처방 받아 먹는다면 이번에도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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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갑을 본 아내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형철 씨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느끼는 불쾌함을 이전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가열담배’였다. 몇 달 전부터 회사 건물 앞에서 굵은 볼펜 같은 스틱에 담배를 끼워 피우는 젊은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땐 담배를 끊은 뒤였기에 그냥 지나쳤었지만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기존 담배처럼 태우는 게 아니고 저온에서 찌는 방식이라 해로움이 덜하다고 했다. 김형철 씨의 부서에도 이런 가열담배를 피우는 직원들이 있었다. 최 과장도 그중 하나였다. 점심을 먹으며 그에게 새 담배에 대해 슬쩍 묻자 무엇보다 냄새가 몸에 배지 않는 게 장점이라고 침을 튀겨 가며 이야기했다. 내친 김에 최 과장의 담배를 빌려 한 대 피워보았다. 연기를 들이마실 때 좀 빡빡한 느낌이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그는 그날로 당장 가열담배를 구입했다.

 

새 담배는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예전에 피워본 액상 전자담배는 플라스틱을 물고 피우는 게 어색해 오래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에 비해 이 담배의 빠는 맛은 기존 담배와 비슷했다. 처음엔 기존 담배와 달리 옥수수 찐 듯한 맛이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사흘쯤 지나자 적응이 되는 듯했다. 가장 좋은 점은 역시 냄새가 덜 난다는 것이었다. 새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부턴 기존 담배를 피우는 직원들에게서 나는 역한 냄새가 금연하고 있을 때처럼 심하게 느껴졌다. 냄새가 없어 실내나 자동차 안에서 피운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불편한 점은 한 대를 피우고 나서 몇 분간은 충전을 해야 해서 줄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건강에는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스틱을 청소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지만 장점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한 번거로움이었다.

 

김형철 씨는 옆에 앉은 남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지 눈 아래가 거무스름했다. 그가 어딜 갔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래된 건물이라 양쪽 끝에 실외 비상 계단이 있었고 병원은 3층 복도 끝에 위치했기 때문에 계단으로 바로 나갈 수 있었다. 각 층의 계단참은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오기 적당한 장소였다. 사실 김형철 씨도 이곳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두어 번 3층 계단참을 이용한 경험이 있었다. 간호사가 김형철 씨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도 계단참에 다녀오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때였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반백의 의사가 그를 알아보고 미소를 띄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늘은 무슨 문제로 오셨나요?”


“요즘 연말이라 일이 많은 데다 술자리가 잦아서 그런지 속이 자주 쓰립니다. 지난달 건강검진에서 위내시경을 했을 땐 가벼운 위염 정도라 했고 그땐 증상도 심하진 않았거든요. 급한 대로 약국에서 위장약을 사 먹었는데 아무래도 선생님께 처방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증상에 대해 몇 가지 문답이 오가는 동안 의사는 익숙한 태도로 타이핑을 치듯 손가락을 책상에 가볍게 두드렸다.

 

“약을 두 주분 처방하겠습니다. 연말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아지실 것 같지만 술은 최대한 줄이셔야 해요.”

 

김형철 씨는 순간 실소를 지었다. 사실 오늘 저녁에도 부서 회식이 있었다. 적어도 남은 열흘간은 의사의 처방을 지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금연은 잘 유지하고 계신가요?”

 

어떻게 하면 예정된 술자리를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그는 갑작스런 의사의 질문에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게, 다시 피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연말에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요.”

 

의사는 김형철 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김형철 씨는 순간 담뱃갑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아내의 표정이 떠올라 황급히 말을 이었다.

 

“다음 달에 업무가 좀 정리되면 다시 끊으려고 합니다. 지난번처럼 선생님께 금연 약 처방을 받으려고 해요. 당분간은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아이코스 말씀인가요?”


“선생님도 아시네요. 기존 담배보다 훨씬 해가 적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요즘은 얼마나 피우시나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부담이 없어서인지 예전보다 더 많이 피워요. 한 갑 반쯤 되는 것 같습니다.”


“해가 적다는 건 담배 회사에서 하는 말인데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워요. 냄새가 덜 나도 기존에 피우시던 담배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그, 그렇군요.”

 

단호한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짓는 김형철 씨에게 의사는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덧붙였다.

 

“보통 전자담배라면 액상 니코틴 담배를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코스는 전자담배가 아니에요. 예전에 유행했던 순한 담배도 그렇고, 확실히 덜 해로운 담배는 아직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끊으시는 게 답이에요.”

 

김형철 씨는 병원 건물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 섰다. 담배 생각이 강하게 났지만 담뱃갑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진 않았다. 정류장 안쪽에선 갈색 코트 차림의 젊은 남자가 익숙한 볼펜 모양의 스틱에 끼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연 버스 정류소”라고 적힌 초록색 스티커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흡연은 국제질병분류(ICD-10) 기준에선 ‘Tobacco dependence’이고,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V) 기준에선 ‘Tobacco Use Disorder’로 분류되는 약물중독의 일종이다. 담배에 함유되어 있는 니코틴은 금연을 방해하는 주범으로 담배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는 성분이기도 하다.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지 않았을 때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짜증이 나는 것은 혈중 니코틴 농도가 떨어지면서 생기는 금단 증상이다. 흔히 흡연자들이 금연하기 어려운 이유로 담배가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애초에 스트레스를 많이 느끼는 것이 니코틴 금단 증상으로 인해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기 때문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흡연을 했을 때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나 만족감을 크게 느낀다면, 그것은 오히려 니코틴 중독이 심하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니코틴 대체제는 가장 오래된 금연치료제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용되어왔다. 금단 증상의 원인이 되는 니코틴을 다른 경로로 제공해 흡연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핵심 원리이다. 껌이나 사탕, 피부에 붙이는 패치 등의 형태로 만든 니코틴 대체제를 사용할 경우 금연 성공률은 두 배가량 높아진다. 2006년 화이자(Pfizer)에서 출시한 바레니클린(성분명 챔픽스, Champix)은 니코틴 수용체에 작용해 금단 증상을 줄이는 약으로, 기존의 니코틴 대체제보다 효과가 더 좋아 금연 성공률을 세 배까지 높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연치료제는 보험이 적용되지 않지만, 2015년부터 시행 중인 건강보험공단 금연치료사업에 참여하는 의료기관에는 금연 약 비용을 전액 지원하고 있다. 이곳의 도움을 받는다면 금전적인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전자담배는 연소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니코틴 용액을 기화시켜 흡입할 수 있게 만드는 전자 기구이며, 타르 등의 발암 성분이 없어 궐련에 비해 안전할 수 있다. 전자담배의 판매량은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왔으며, 미국 십 대 청소년의 경우 2014년에 이미 전자 담배 사용자가 궐련 사용자를 추월한 바 있다. 전자담배의 유해성과 금연 효과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다. 2009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처음 전자담배의 유해성을 경고한 이후 세계보건기구(WHO)를 포함한 많은 전문 단체에서 그 잠재적 위험성을 보고해왔다. 반면 영국에서는 2016년에 일부 전자담배를 금연 목적으로 처방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학계에서 ‘HNB(Heat-not-burn) tobacco’로 통칭하는 ‘가열담배’는 2014년 일본에서 시판된 아이코스가 최초다. 아이코스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2017년에는 12퍼센트가 넘는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2017년 출시 이후 3개월만에 시장점유율 5퍼센트를 기록했다. 제조사인 필립모리스는 섭씨 850도에서 불완전 연소되는 일반 궐련과 달리 아이코스의 경우 섭씨 300~350도에서 가열하므로 연기에 포함된 유해물질의 90퍼센트를 줄였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아이코스 연기를 분석한 결과 궐련에 비해 양은 적었지만 다수의 독성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에 HNB의 안전성을 홍보하려는 담배 회사와 안전성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근거를 요구하는 학계 사이에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HNB를 ‘궐련형 전자담배’로 분류하고 있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액상 전자담배보다 기존 궐련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HNB 제품은 아이코스(iQOS), 글로(Glo), 릴(Lil) 등 3종이다.

 

* 참고문헌: 이철민, “아이코스와 글로: 더 안전한 담배인가?”, <금연정책포럼> 제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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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난 큰 강아지 신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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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황금 개띠의 해, 무술년이다. 개띠 해를 맞이해 광고부터 상품까지 다양한 마케팅에서 강아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마케팅의 훈훈한 포즈와는 달리 실제 반려견에 관한 소식은 올해 겨울처럼 차디차다. ‘펫파라치’, ‘체고 40cm 이상 반려견 입마개 의무화’ 등 반려견 관련 논쟁은 한창 진행 중이다. 대형견을 키우는 견주로서 가슴 철렁한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요즘. 나는 나의 큰 개를 바라본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바라보는 눈길로 나의 큰 개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 쓰려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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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사는 신지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 이제 막 1살 9개월이 되었고 몸무게는 28kg이다. 물론 체고가 40cm 이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반려견에 대해, 특히 래브라도 리트리버에 대한 이해가 1도 없는 상태에서 신지를 입양했다. 솔직히 말해서 순하게 생긴 눈, 세모 모양으로 쳐진 귀가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에, 단지 외형이 귀엽기 때문에 입양을 결정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맹인안내견으로 활약하는 견종이라는 것, 워낙 순하고 사람에게 친화적이라 ‘천사견’으로 불린다는 것 정도였다. 그래서 신지가 일명 ‘개린이’라 불리는 유아기를 지나 ‘개춘기’라 불리는 청소년기를 지날 때까지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을 보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의 유년은 그야말로 ‘악마견’이다. 신지는 이갈이(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는 시기와 그 시기의 물어뜯기를 통칭한다)가 매우 심했던 편이라 집에 있는 모든 가구는 다 물어 뜯어 놓았고 배변 실수도 잦았다. 식탐은 얼마나 강한지 사람이 먹는 음식을 억지로 입에 넣다 탈이 난 적도 많고 ‘앉아’ ‘손’ 같은 기본적인 복종 훈련을 숙지하는 시간도 다른 강아지들보다 오래 걸린 편이다. 그러나 초보 견주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신지는 부지런히 성장했고 다행히 아주 조금(?) 천사견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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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를 기르면서 알게 된 것이 많다.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의 특징과 취약한 질병, 그에 따른 훈련법과 관리법. 뿐만 아니라 모든 강아지들에게도 사람과 같은 성향 차이가 있다는 것. 모든 강아지들이 언제나, 어떤 순간에나 사람 옆에서 애교를 부리고 해맑게 뛰어노는 게 아니라는 것. 강아지들에게도 생애 주기가 있고 그 시기에 맞는 행동 양상을 보인다는 것.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고양이도, 수달도, 부엉이도 그리고 사람도. 왜 인간은 이 간단한 진실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할까. 왜 글자뿐인 법이나 규정으로 덕지덕지 가리고, 덮어두려고만 할까. 그 이면에는 차별이라는 민낯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신지와 가족이 되기 전에 강아지 입양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의 특성과 취약점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강아지를 입양하는 비용이 책임감을 체감할 수 있을 만큼 비싸고, 의료비는 합리적인 수준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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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kg에 육박하는 신지가 나에게 안겨 온다. 나이는 얼추 성견이 되었지만 아직도 제가 작은 강아지인 줄 아는 녀석은 내 품에 쏙 안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안기기에 실패한 신지는 엉덩이를 내 허벅지에 기댄다. 신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는 듯 느긋하게 하품을 한다. 나에게 등을 보인 채로 얌전히 잠에 빠져든다. 그런 신지가 귀여워 미쳐버릴 것 같을 때 조용히 휴대폰을 가져와 잠든 신지의 사진을 찍는다. 산책할 때 갑자기 까치가 튀어나와 목줄을 놓칠 뻔했을 때, 골목 반대쪽에서 동네 누렁이가 등장해 긴장 상태를 유지할 때는 강한 힘의 신지를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진땀을 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상쇄하는 신지의 자는 모습. 아마 모든 반려동물을 키우는 견주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대형견을 키우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큰 강아지를 키우면 더 힘들지 않아요?” “큰 강아지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처음에는 이런 말 속에 숨은 가시에 찔려 상처받는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 초보견주 딱지를 어느 정도는 떼었을까. 나는 웃으며 답한다. 덩치가 크든 작든 가족이 함께 산다는 건 모두 똑같이 힘든 일이라고. 크기와 상관없이 함께 있어 행복한 순간은 매일 찾아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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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양성평등이 아니고 성평등이 옳은가? – 과학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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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왜 육아 칼럼에 성정체성에 대한 얘기를 쓰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분명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적 인식으로는 이 어린이들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트랜스젠더가 인간의 성에 있어 정상적인 측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지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많은 분들이 인간의 성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남성의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는 그 반대 상황은 당사자에게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보니 자기 몸이 반대인 성으로 바뀌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뭔가 잘못되었다는, 약간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는 느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것만도 힘든데 주변에서는 매일, 매순간 자신에게 맞지 않는 태도와 행동을 기대합니다. 어느 날 견디다 못한 아이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사실 나는 여자아이에요.” 엄마는 참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 계속되면 부모도 아이가 뭔가 고통스러운 일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눈치챕니다. 하지만 엄마도, 아빠도 그 고통이 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릅니다. 알지 못하니 해결해줄 수 없고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그냥 크면서 좋아지려니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트랜스젠더인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필연적으로 문제를 겪습니다. 학교에서 왕따에 시달리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약물에 빠져들거나, 폭력 등 비행을 저지르거나, 가족에게 버림받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일도 흔합니다. 성인이 되어도 삶은 비참합니다. 사회 자체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이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자기는 분명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기는 너무 싫은데, 몸은 남성이니 여자 화장실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삶이 고통스럽고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에 우울증, 불안 등 정신적인 문제도 많습니다. 자살률 또한 전체 인구의 9-10배에 이릅니다.

 

도대체 아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믿는다면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을 ‘트랜스젠더’라고 명명하는 순간, 해결의 길이 열립니다. 그것이 질병이나 비도덕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의 존재 방식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희망의 불빛이 반짝 켜집니다. 트랜스젠더라는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고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겁니다. 이제 부모는 아이가 겪는 문제가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의 불꽃이 켜진 순간, 그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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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 젠더 확정(Gender Affirming)


젠더 확정에 관한 내용은 주로 미국의 이야기입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가장 앞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료인들이 있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다 나이가 들어 성전환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테드(TED)에 나가 강연도 합니다. 그런 미국조차 일반 대중의 인식은 아직 매우 낮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한적인 매체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어 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작년 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이 문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루고, 유명 언론인 케이티 커릭(Katie Couric)이 <젠더 혁명(Gender Revolution)>이라는 다큐를 발표하면서 국면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 다큐는 젠더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보아야 할 자료인데 유튜브에 올라 있습니다. 어쨌든 미국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우리나라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뜻과 함께, 사회가 과학에 의해 밝혀진 진실을 받아들이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해결 과정을 고민하는 과정이 시사하는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신의 성을 부정할 때 부모는 당연히 혼란과 좌절에 휩싸입니다. 어느 부모인들 그런 사실을 편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트랜스젠더가 무엇인지 알고, 자녀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가 진정한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는 의사와 심리상담자,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 더 나아가 사회의 이해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모든 소수자 문제가 그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과 인식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아이라도 성적 정체성이 여성이라 여자아이들이 입는 옷을 입고, 여자아이들이 하는 놀이를 하고, 여자아이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한다면 존중해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을 생물학적(신체적) 전환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회적 전환(social transition)이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새로운 성적 역할에 익숙해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겁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뭔가 문제가 있는 존재로 바라보지만, 사실 트랜스젠더로서 겪는 문제는 대부분 본인의 문제라기보다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주지 않는 사회의 문제입니다. 사춘기 전까지는 주된 인간관계가 가정과 학교로 제한적이므로 부모가 충분한 교육을 받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이해하고 인정해준다면 큰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사춘기가 시작되어 신체에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맞지 않는 변화가 진행되면 일단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유방이 나오거나, 목소리가 낮아지는 등의 변화는 한번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춘기까지 아이의 성적 정체성이 유지된다면 일단 호르몬 주사를 사용하여 사춘기를 늦출 필요가 있습니다. 생물학적 전환(biological transition)과정을 바로 시작하지 않는 것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성적 정체성이 변하거나 성전환 방법에 대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를 늦추는 호르몬은 끊으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도 성적 정체성이 유지된다면 이제는 신체를 성적 정체성과 일치시키기 위해 성 호르몬을 써서 원하는 방향으로 사춘기를 일으킵니다. 이때 생식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으므로 나중에 자녀를 원할 때를 대비하여 정자은행을 이용하거나 난자를 냉동시킵니다. 성인이 되어 신체를 성적 정체성과 더욱 일치시키고 싶다면 젠더 확정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사춘기까지 또는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도 성적 정체성이 유지된다면’이라고 말한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성적 정체성은 어린 나이에 발현되기 때문에 아이가 다른 성이 되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물론 그 말을 존중해주어야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남자아이가 드레스를 입고 공주 역할하기를 좋아한다거나, 여자아이가 머리를 짧게 깎고 모든 면에서 선머슴처럼 굴 때 그것이 진정한 성적 정체성인지 성적 표현의 취향인지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경향이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고, 강력하게(persistent, consistent, and insistent)’ 유지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둘째, 바로 다음에 설명할 넌바이너리나 성적 유동성을 지닌 경우 어느 쪽으로 확정해야 할지 애매합니다. 자신이 완전히 남성이나 완전히 여성이 아니라고 느끼거나, 정체성이 자꾸 변한다고 해도 사춘기를 거치면 신체는 어느 한쪽으로 고착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사춘기를 무한정 연기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찾아옵니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은 다른 사람이 규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란 점을 이해한다면 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주변 사람은 물론 스스로도 그런 결정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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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brook Community Recreation Center의 성평등 화장실

 

젠더 스펙트럼(Gender Spectrum)과 성적 유동성(Gender Fluidity)


4가지 기본 영역을 설명할 때 생물학적 성, 성적 표현, 성적 지향에 대해서는 중간 단계가 있다고 했지요. 각각 간성, 중성적, 양성애자 또는 무성애자라고 했습니다. 그럼 성적 정체성에는 중간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현재 젠더에 대한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트랜스젠더가 진정한 자아를 찾도록 돕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성적 정체성 또한 남/녀라는 이분법적 틀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트랜스젠더란 생물학적 성과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예컨대 생물학적으로 남자아이가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는 상태라는 거죠. 그런데 여자라고 느끼는 게 아니라,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다시 ‘나는 성이 없어(무성, agender)’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속엔 여자와 남자가 모두 있어. 반반 정도랄까?’라는 사람도 있고, ‘나는 1/3정도는 남자고 2/3 정도는 여자인 것 같아’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넌바이너리(non-binary)또는 젠더퀴어(genderqueer)라고 합니다.

 

바이너리(binary)란 이분법이란 뜻이니까, 넌바이너리라고 하면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남녀라고 구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퀴어(queer)란 본디 ‘기묘한’이란 뜻으로 ‘상궤(常軌)를 벗어났다’는 표현입니다. 현재는 퀴어 퍼레이드, 퀴어 영화 등 주로 성소수자를 통칭하는 말로 쓰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성소수자들 중에서도 교육받은 상류층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특권적인 어감으로도 쓰이며, 넓은 의미로는 규범화된 기존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그러나 젠더와 결합한 단어로 성적 정체성의 맥락에서 쓰일 때는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는 트랜스젠더를 지칭합니다.

 

성적 정체성이 이분법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좀 더 자세히 봅시다. 수평으로 선을 긋고 한쪽 끝을 남성 100%, 한쪽 끝을 여성 100%라고 한다면 가운데는 남성 50%, 여성 50%가 되겠지요? 세 가지 지점 사이에도 남성 10%/여성 90%, 남성 11%/여성 89%, 남성 11.15%/여성 88.85% 등 무수한 경우가 있을 겁니다. 따라서 현재 과학자들은 성적 정체성이 이분법적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연속적인 스펙트럼 형태를 띤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젠더 스펙트럼(gender spectrum)이라고 합니다. 좀 복잡하지요? 더 복잡한 것은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 중 6% 정도는 성적 정체성 또는 성적 표현이 변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난 아이가 한때는 스스로 남자라고 느꼈다가 어떤 시기에는 여자로 느끼거나, 또 시간이 흐르면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무성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현상을 성적 유동성(gender fluidity)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성평등이냐 양성평등이냐는 논쟁은 별 의미가 없지요. 존재하는 것을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따라 재단할 수는 없으니까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옳다면 그냥 ‘성평등’이라고 해야 옳은 겁니다.


 

 

#성소수자_LGBT(Q)강병철, 백조연, 이주원, 효록, 오승재 저 | 알마
그들은 여전히 소수이며 여전히 사회적 약자다. 그리고 ‘소수(少數)’를 만드는 것은, 의식 속에서 소수를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내 옆에는 없는 무언가’로 규정짓는 다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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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이 아닌 스토리를 쌓아가는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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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ld Green Figures Playmobil Funny Police Officers

 


혼자 사는 남자들은 아무래도 무언가 많이 사게 된다. 별 이유는 없다. 엄마나 아내의 매서운 눈초리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크겠지만 남자들이 공간을 향유하는 기본 방식이 자신을 드러내는 물건들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맨 케이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남자란 주관을 갖고 자신의 일상과 소비를 관리하고 향유하는 어른을 뜻한다. 금요일에 잡힌 회식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가거나, 방구석에다가 옷가지를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널브려놓고 사는 사람들은 논외로 한다.

 

이제 문제는 무얼 채워 넣느냐는 거다. 자신을 대변하는 물건은 곧 취향과 문화와 결부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대부분은 퍽퍽하게 살았거나 핵우산처럼 강력한 치맛바람 아래서 ‘포시랍게’ 자란 탓에 사실상 손에 들 수 있는 선택지가 몇 가지 없다. 이런 척박한 역사 속에서 남자의 공간이란 새로운 문화가 만나 꽃 피운 산업이 바로 키덜트다. 여섯 살 언저리에서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종류의 장난감을 사 모으는 입장에서 작금의 현상을 이렇게 파악한다.

 

다 큰 어른 집에 장난감 좀 있다고 모두 같은 범주로 묶이는 게 끔찍하지만 어쨌든 조르고 졸라서 플레이모빌 성 한 채를 얻어낸 뒤, 지금까지 꾸준히 사 모으고 있다. 성을 축조한 다음날 아침의 설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이후 이 성은 절대 함락되어서는 안 될 내 영혼의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정예 기사들과 함께 내 방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플레이모빌은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레고와 쌍벽을 이루는 아이들의 루이뷔통이었다. 유서 깊은 독일의 완구 기업 게오브라(Geobra)사가 1974년에 미니피규어라는 개념을 내세워 출시한 플레이모빌은 블록 장난감을 표방한 레고와 달리 자신만의 스토리와 감성을 투영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에 특화된 장난감이었다. 블록완구로 성장한 레고가 70년대 후반 갑자기 ‘레고 머리’로 유명한 웃는 상의 미니피규어를 내놓게 된 것도 클릭키(klicky, 웃는 상의 플레이모빌 피규어 얼굴 디자인) 페이스의 플레이모빌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플레이모빌의 매력은 이들이 가장 그럴듯하다는 데 있다. 7.5센티미터의 키는 전투력에 심각한 의문을 품게 하는 레고처럼 너무 작지 않고, 영화나 애니메이션 피규어처럼 너무 크거나 사실적이지 않아 나만의 이야기를 입히는 데 적당하다. 역사적 미술 고증에 역점을 둔 디자인덕분에 감성적인 인테리어 오브제로도 각광받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빈티지 제품을 수집하는 애호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물론, 나는 남자다보니 중세시대 기사와 서부시대 기병대와 카우보이만 사 모은다. 전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전히 전시 상황이라 여기고 병력을 보충하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아이나 여성 피규어는 마련해본 적이 없다. 어른답게 관리도 철저히 한다. 일주일에 한번 총채로 털어내서 먼지가 눌러 붙지 않게 청소하고, 절대로 넘어진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장난감을 박스에 담아 보관하는 것은 우린 패전으로 간주한다. 다만, 간혹 부모님이 방문할 때만 혼기를 놓친 자식의 마지막 도리로서 잠시 베란다 창고 요새로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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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 응급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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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45H 승객. 기내식을 전혀 안 먹어요.”


옆에서 기내식 카트를 정리하던 손주연 씨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안색도 좋아 보이지 않던데.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카트를 정리하는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업무에 익숙해지면 어떤 상황에서든 공식처럼 순서에 따라 몸이 움직이게 된다. 장거리든 단거리든 식사를 서비스할 때가 가장 바쁜 움직임이 필요한 시간이다. 손주연 씨는 아직 장거리 비행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손이 빠르고 야무져서 선배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45H?”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유미현 씨의 반응에 손주연 씨가 덧붙였다.


“호빵맨 옆 자리요. 반백 머리에 마른 남자.”

 

유미현 씨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목소리였기에 객실 쪽에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늘 몸에 배어 있는 조심성이었다. 승객을 지칭할 때 보통은 좌석 번호를 사용하지만 승무원들끼리는 가끔 별명을 지어 불렀다. 손주연 씨는 이 부분에 특출한 능력을 보였는데, 평범해 보이는 승객의 특징을 용케 잘 잡아내 동료들을 웃게 만들곤 했다. 그것은 다양한 승객을 대하며 쌓인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나름의 방식이었고, 특히 진상 고객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유미현 씨는 커튼을 살짝 젖히고 45H 좌석 쪽을 바라보았다. 인천발 프랑크프루트행 항공기의 비행 시간은 열두 시간이었다. 대양을 건너는 항공편이 대부분 그렇듯 기내식 두 번과 간식 한 번이 서비스된다. 지금은 두 번째 식사 시간이었다. 비행 중 제공되는 식사는 항공료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먹지 않는 걸 손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음료의 경우엔 대개 세 번까진 반복해 제공되기 때문에 연거푸 마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승객도 간혹 만나게 된다. 오늘도 단체 여행객 중 노부부 한 쌍이 음료 서비스 도중에 가벼운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연달아 와인을 주문하는 남편과 말리려는 아내 사이에 실랑이가 생긴 것이다. 아무튼 열 시간이 넘는 비행 중에 두 번의 기내식을 모두 건너뛰는 승객은 흔치 않았다. 몸이 아픈 건지도 모른다.

 

“내가 한번 가볼게.”


장거리 비행 중엔 식사 시간이 가장 소란스러운 때다. 식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45H 좌석 승객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식사를 전혀 안 드시는데,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남자는 감았던 눈을 뜨고 유미현 씨를 바라보았다. 주름이 없는 매끈한 피부였지만 머리칼은 백발에 가까웠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머리 색은 기내 조명 때문에 더 하얗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파리한 안색의 남자는 미소인지 찡그린 것인지 애매한 표정을 띄우고 짧게 이야기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음료라도 좀더 준비해드릴까요?”


“그렇다면 물 한 잔만 부탁해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승무원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가 이야기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멀미가 생겨서요. 식사를 안 하는게 더 편합니다.”

 

옆 자리에 앉은 거구의 중년 남자는 닭고기 조림 용기를 조심스럽게 긁고 있었다. 동그랗고 넓은 콧등과 홍조 띤 볼이 정말 호빵맨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유미현 씨는 또 한번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반백 머리의 남자는 그와 비교가 되어서인지 더 말라보이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기내의 소란스럽던 공기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식판 수거를 마무리하고 카트를 제자리에 밀어넣은 손주연 씨가 깍지를 끼고 길게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이제 다시 편안한 비행을 즐겨 보실까요.”

 

유미현 씨는 미소를 지었다. 짧은 여유로움을 즐겨도 되는 때였다. 착륙까지 남은 비행 시간 동안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20분쯤 지났을까.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비명에 유미현 씨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반사적으로 일어나 비명이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놀란 사람들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57I 또는 K. 아니면 58. 단체 여행객들이 모인 블록의 좌석이었다. 순간 와인을 여러 차례 주문했던 노부부가 떠올랐다.

 

“이이가, 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고…… 그리고 쓰러졌어요.”

 

노인의 고개는 옆으로 축 쳐져 있었다. 안색이 하얘진 아내는 울먹이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설명했다. 옆 자리의 젊은 남자가 노인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미현 씨는 옆에 있는 손주연 씨를 바라보았다. 늘 유쾌한 그녀이지만 당황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으니 실제 위중한 응급 환자를 만난 것은 처음일지도 모른다. 유미현 씨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상급자인 그녀가 상황을 리드해야 했다. 우선 승객들을 안정시키고 환자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안내 방송 부탁해.”


유미현 씨의 지시를 받은 손주연 씨가 신속하게 자리를 떴다.


“기내에 응급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승객 중에 의사나 간호사가 계시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내에……”


“의사입니다. 무슨 일인가요?”

 

평소보다 다급한 말투의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유미현 씨는 뒤를 돌아보았다. 큰 키에 반백 머리, 마른 얼굴의 남자. 45H 승객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남자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환자의 목과 손목에 손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일단 환자를 눕혀야 하니 같이 도와주세요.”

 

그는 옆 자리의 중년 남성과 함께 축 늘어진 환자를 좌석에서 끌어냈다. 작은 체구의 노인인 것이 다행이었다. 다시 돌아온 손주연 씨는 다른 승무원과 함께 주변 승객들에게 음료를 서비스하고 있었다. 환자를 옮기는 걸 보고 웅성거리던 승객들이 이내 조용해졌다. 승객들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데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늘 신입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인데 그새 미더운 동료가 된 느낌이었다. 유미현 씨는 환자와 관련된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불안해하는 환자의 아내를 승무원용 의자에 앉혀야 했다. 행여 긴장해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의사는 환자를 기내 뒤편의 갤리 바닥에 눕히고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지만 맥박이 불규칙하고 약합니다. 기내 응급 키트가 있을 텐데요. 산소도 함께 준비해주세요.”


유미현 씨가 응급 키트를 가지고 오는 동안 의사는 울먹거리는 아내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 평소 지병은 없었나요?”


“고혈압이랑 부정맥 약을 먹고 있어요. 다른 병은 없고 건강한 편이었는데……”


“쓰러지시기 전에 다른 증상은 없었구요?”


“식사 하고 나서 좀 두근거린다고 했어요. 그러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움켜쥐더니 그냥 고꾸라졌어요. 그러길래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이 양반이 공짜라고 술을 자꾸 마시더니…… 의사 선생님. 큰일은 없겠지요?”


의사는 응급 키트에서 꺼낸 혈압계 커프를 환자의 팔에 감았다.


“80/60. 환자 다리를 높여주세요. 베게든 담요든 환자 다리 밑에 넣으면 됩니다.”


유미현 씨가 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동안 그는 산소를 연결해 공급하고 수액 세트를 꺼냈다. 수액 백을 든 그녀는 환자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주사 바늘을 꽂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수액이 제대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의사는 의료용 테이프로 세트를 단단히 고정했다.

 

“비행 스트레스와 알코올 기운으로 갑자기 부정맥이 심해졌던 것 같은데, 일단 필요한 조치는 다 했으니 이제 상태를 지켜보죠.”

 

의사는 한숨을 내쉬고 유미현 씨 옆에 주저앉았다. 노인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이어지며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혈압을 다시 측정한 의사가 환자의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혈압도 오르고 맥박도 안정이 되신 것 같네요. 제가 지켜볼 테니 자리에 가 계세요.”


그녀는 고맙다며 연신 머리를 숙이고 다른 승무원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선생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유미현 씨의 물음에 멀뚱히 쳐다보던 의사는 이내 이해했다는 듯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가벼운 어지럼증 정도인데요. 오히려 환자를 보는 동안 잊어버렸어요.”


“이렇게 심한 응급 환자가 생긴 건 오랜만의 일인데, 선생님이 계셔서 큰 사고를 면한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저도 기내에서 환자에게 산소와 수액까지 준 건 처음입니다. 사실 마지막으로 수액을 직접 주사한 것도 백만 년은 된 것 같은데, 아직 손이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에요.”


“자전거 안장에 오랜만에 올라도 타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과 비슷한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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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착륙을 앞두고 하강을 준비하는 비행기의 엔진이 웅웅거렸다. 도착을 예고하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동안 의사는 다시 환자의 혈압을 체크했다.


“환자가 생기면 승객 중에 의사 선생님이 계신지 확인하곤 하는데 늘 오늘처럼 운이 좋진 않아요.”


“방송을 들었다 해도 나서지 않는 경우도 있을 거에요.”


“이해해요. 혹시 환자가 잘못되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이 있겠죠.”


“중대한 과실이 없다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법 조항이 있지만, 중대한 과실이냐 아니냐 자체가 애매한 구석이 있어요. 더군다나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엔 완전히 면책이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이 있다 해도 환자가 소송을 거는 것까지 막진 못하거든요.”


“네? 설마 선의로 도와주려 한 의사에게 소송까지 거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아뇨. 설마 하는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건 몰랐어요.”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한 듯 유미현 씨가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행을 가시는 건가요?”


“딸을 만나러 갑니다. 엄마와 같이 이곳에 살고 있거든요.”


“따님이 유학 중인가 봐요. 좋으시겠어요.”


“6개월 만에 보는 거니까요.”

 

순간 유미현 씨가 소리쳤다.


“환자가 눈을 떴어요!”

 

의식을 되찾은 환자의 상태는 다행히 안정적이었다. 의사가 환자와 대화를 나누며 진찰을 하는 동안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떴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공항에 의료진이 대기하기로 했어요.”


“잘됐네요.”


“환자를 처음 진료하셨으니 나중에 선생님께 환자 상태와 관련해 여쭤볼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독일에서 머무실 주소와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잠시 망설이던 그가 종이에 호텔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적어 유미현 씨에게 건넸다.


“이 호텔, 저도 예전에 묵었던 곳이에요. 그런데 왜 가족과 함께 지내지 않으시고?”


“지금은 가족이 아니거든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괜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수현 선생님께 감사의 표시로 준비했어요. 일등석에 서비스하는 와인 한 병입니다. 더 좋은 선물을 드려야 마땅하지만 지금은 따로 준비된 게 없어서요.”


“좋은 와인이네요.”


“와인을 좋아하시나 봐요.”


“아뇨. 저는 이제 마시지 않습니다. 아이 엄마가 예전에 좋아하던 와인이에요. 지금도 즐겨 마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랜딩 기어가 작동하며 생기는 익숙한 소음과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창 바깥으론 어둠이 깔린 공항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랫동안 비행을 해오면서 여러 공항을 경험했지만 그중에서도 프랑크프루트 공항의 야경은 유미현 씨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였다. 창 밖의 야경은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활주로의 불빛은 평소보다 낯설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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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Good Samaritan - Jose Tapiro Baro

 

 

1만 미터 이상의 고도를 비행하는 항공기 기내에서는 낮은 기압과 습도 등으로 인해 응급 환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2013년에 발표된 해외 연구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0년까지 5개 항공사에서 발생한 1만 2,000건의 기내 응급 환자에 대한 검토 결과 600회 비행에 1명 꼴로 응급 환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0.3퍼센트는 사망했다.

 

응급 환자가 생기면 흔히 승객 중 의료진을 찾는 방송을 내보낸다. 하지만 승객으로 탑승한 의사 입장에서 닥터콜에 선뜻 응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전공에 따라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힘들 수도 있고, 기내에 어떤 의료 장비가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위중한 환자를 진료했다가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의료 분쟁에 대한 부담감이다.

 

지난 2008년 일반인 또는 응급 의료 종사자가 업무 수행 중이 아닌 때 실시한 응급 의료 행위에 대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민사상 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 책임을 면책하고 사망에 대한 형사 책임을 감면토록 하는 '응급의료법 제5조의2(선의의 응급 의료에 대한 면책, 일명 착한 사마리아인 법)을 신설한 바 있다. 하지만 ‘중대한 과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호하며,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 형사 책임에 대해 면책이 아닌 ‘감면’한다는 문구로 인해 이 법을 아는 의료인은 환자 사망의 경우 형사 책임이 따른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이 법이 의료 분쟁이 생기는 것 자체를 막아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법률이 의사의 기내 응급상황 참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445명의 의사를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 기내 응급상황을 실제 경험한 96명의 의사 중 진료에 참여한 사람은 73명(76퍼센트)이었다. 참여하지 않은 사람 중 이미 다른 의사가 있어서 참여하지 않았다고 답한 13명을 제외한 숫자는 10명(10.4퍼센트) 뿐이었다. 실제 현장에선 대부분의 의사들이 닥터콜에 응한 셈이다. 하지만 앞으로 기내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445명 가운데 274명(61.6퍼센트)만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또한 응급 의료 관련 법률을 잘 알고 있을수록 참여 의향은 더 떨어졌으며, 313명(70.3퍼센트)은 현재의 법률이 기내 응급 환자 진료에 대한 참여를 독려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의료진의 사명감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 개선을 통해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 임소연 등. 기내 닥터콜과 환자의 안전. 항공우주의학회지 2017. 27권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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